▲ 영화 <택시 운전사> 포스터. |
영화 <택시 운전사>(2017)가 천만 관객을 동원했다고 합니다. 큰 흥행을 했다는 말입니다. 영화 산업 면에서 이는 뜻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작품의 완성도나 예술성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한 영화의 대중성을 말해 줄 따름입니다. 다른 나라의 경우 영화의 흥행을 매출액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돈을 얼마나 벌었느냐는 것이죠.
<택시 운전사>는 두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광주 민주화 항쟁을 취재하려는 독일 기자와 그를 태운 서울 택시 기사. 만섭은 피터를 광주에 데려다 주고, 다시 서울로 데려옵니다. 그 과정에서 만섭은 피터를 두고 혼자 나오려다 광주로 되돌아갑니다. 만섭의 택시는 피터만이 아니라 관객들도 광주로 데려갑니다. 그런데 관객들은 만섭에게 정서적으로 공감할 뿐 피터의 내면이나 그가 광주를 취재하는 이유, 관점에 접근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피터와 만섭이 이렇다 할 소통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터가 아니라 만섭의 감정 변화만을 따라 광주를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아쉽기 그지없습니다.
실화이기도 한 택시 기사 만섭의 용기는 감탄할만합니다. 하지만 그의 광주행은 우연입니다. 이후의 그의 행적에 대해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에 비해 피터는 위험을 알면서도 광주로 향했고, 목숨을 걸고 취재했으며, 그 내용을 전세계에 보도했습니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광주에 대해 애정을 지녔고, 신체의 일부가 광주에 묻혔습니다. 그러므로 관객들은 만섭을 통해 피터를 더 의미 있게 만났어야 합니다. 그것이 광주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길이니까요.
실상 두 사람은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영화적으로 더 아름답게 표현될 수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만섭의 시점으로 피터가 위험을 무릅쓰고 취재하는 것을 보여주든지, 부상당한 피터를 만섭이 밤새 돌보든지, 아니면 진압을 피해 숨은 곳에서 광주 시민의 공포와 분노를 함께 나누든지 말입니다. 이른바 동지적 우정을 통한 인식의 공유에까지 이르렀다면 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변호인>(2013), <명량>(2014) 등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도 비슷합니다. 노무현 변호사, 이순신 장군의 삶과 성찰, 가치의 실천을 보여주기보다 드라마틱한 장면을 극대화함으로써 관객들의 정서적 쾌감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천만 관객은 의미 있는 숫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화의 모든 것을 말해 주지는 않습니다.
김대중(영화평론가, 영화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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