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군봉에서 내려다본 대청호 일대 |
산성은 염치리 장군봉으로부터 대청호를 따라 서쪽 신대리까지 3km 정도 뻗어내린 능선 맨 끝자락에 있다. 2000년대 초까지는 청남대 출입 금지 구역이어서 이 성의 존재를 확인한 사람이 없었다.
성의 동·서·남의 외벽은 모두 험한 지세이나 북쪽만은 염티 방면으로 능선이 뻗어있다. 그 능선상 낮은 안부(鞍部-성재)에 서쪽 신대리 섯밭 마을과 동쪽 샘골(샴골)로 통하는 고개(골프장 뒤편)가 있다. 그 고개는 줄기에서 경사가 가장 낮아 적의 내습이 가장 용이할 지점으로 여기서 성으로 오르는 능선에 8m 간격으로 길이 12m, 두께 6m 정도의 반원형 토루 2 개소의 흔적이 있다. 정상 부분에 장대지가 있고, 외성 둘레 261m 중 60m는 석축, 나머지는 토축인데 서쪽 약 절반 부분이 유존 상태가 가장 양호하다.
▲ 장군봉산성 전면에 있는 형강나루 |
금강은 가호리, 후곡리를 거치며 내려오는 넓지 않은 상류가 샘골 앞에서 ㄴ자로 꺾여 형강나루 근처 텃골(초가정 서쪽), 섵밭마을을 지나 내려갔다.
과거 지도들에는 신대리 형강(荊江)나루를 건너 대전 신탄진 또는 회덕으로 진출하는 통행로도 선명하다. 또한 과거 산성 전면으로 문의 덕류(과거 驛이 있던 지역)에서 앞 형강 나루를 건너 증약, 옥천, 경상도 방면으로 오가던 조선시대 한양-영남 대로가 있어 문의(회인)-회덕간의 동서뿐만 아니라 한양-삼남으로 통하는 남북 교통로가 교차하여 방위상 대단히 긴요하였다. 과거 이곳의 웅진, 사비시대 군사적 요충지로서 그 중심에 있는 장군봉산성의 존재 가치와 축성 당위성을 짐작케 한다.
▲ 장군봉산성 성재와 산성 |
성의 정상 망대 옆에 유사시 투석용으로 사용됐을 돌무더기가 있다. 이런 투석전용 돌무더기는 금산의 자지성에서 그 실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돌의 크기는 대체로 어른의 주먹 두세 개 정도로 둥글둥글하다. 유사시 성벽을 타고 오르는 적을 향해 던지기 적당한 것들인데 모두 강가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청남대가 위치한 성의 끝부분 서쪽이 신대리이며 과거에는 섵밭마을(현 청남대 사무동 부근), 텃골(청남대 본관 인근), 형강마을(텃골 아래쪽) 등의 강변 마을들이 자리했었다. 서쪽 신대리와 동쪽 산덕, 문덕리의 경계가 되는데 이곳들은 모두 수몰됐다. 동벽(절벽)에 서면 구르륵거리며 흐르는 푸른 강물 소리가 풍광과 어울려 장관을 이룬다.
현재 성밑 섵밭마을과 텃골마을은 청남대 중심지, 골프장으로 변하고, 샘골마을은 수몰돼 길들도 전혀 찾을 길 없다.
한때는 대통령의 휴양지로 황금 도구들로 치장한 별장지라고 낭설이 돌던 청남대가 발아래다. 실제 개방된 후에야 바람처럼 사라진 소문들이었지만 인간사가 다 그런 것이 아닌가. 자기 고향에서 유물을 가져다 놓거나 조깅하면서 산책을 즐기던 이, 의기양양하게 졸개들의 아첨을 받으며 골프를 치던 인물, 제각각이었지만 권력을 잡기 위해 서로 치고받던 그들도 지금은 길가에 나란히 서서 사람들을 맞이한다. 한때는 각종 포대에 특공대, UDT 대원들로 주변이 살벌했던 적이 있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경내를 드나든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성 자취를 더듬기 위해 철조망에 찢기고 번득이는 감시병들에 겁이 나던 일은 다반사였지만 지금은 시민들이 약간의 입장료만 내고서 한가로이 하루를 즐길 수 있으니 참으로 세상이 많이 변했다.
호수 건너 계족산 위로 지는 낙조와 실루엣, 갖가지 꽃에 쌓인 풍경은 청남대 비경 중 하나다.
조영연 / ‘시간따라 길따라 다시 밟는 산성과 백제 뒷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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