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지연 우송대 외래교수 |
장자의 핵심 사상으로 소요유와 제물론이 꼽힌다. 소요유와 제물론은 책의 맨 앞머리에 나온다. 차례대로 내편의 첫 장과 두 번째 장이니 입지 조건만으로도 장자 철학의 최전선이라 할 만하다. 공교롭게도 둘의 의미는 현대인에게 중요한 두 가지 가치와 정확히 매치된다. 소요유는 자유, 제물론은 평등과 통하는 것이다.
내친김에 장자 내편의 장별 제목과 구성을 살펴보자. 덕이 충만하여 드러난 상태를 가리키는 형용사구 덕충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명사구다. 양생주와 인간세는 사람과 세상에 대한 각론이요, 대종사와 응제왕은 학문과 정치에 연관된 보론일 것이다. 주제가 집약된 총론 격의 소요유와 제물론만이 동사구라는 점이 새삼 특이하다.
소요유에는 목적어도 보어도 없다. 온통 노닐고(逍) 거닐고(遙) 또 논다(遊). 거대한 물고기가 새로 변하여 수면을 뚫고 날아오르는 첫 대목은 웅장하고 환상적인 오프닝이다. 서두에 가장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고대의 문헌 체제 상 책 전체를 열어젖히는 이 이미지는 당연히 장자 사상 전반을 관통한다. 데미안의 말대로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기존의 해석들은 다 나름대로 옳지만 평범한 생활인의 입장에서는 왠지 멀게만 들린다. 먹고살기 팍팍한데 유유자적 운운하는 것도 짜증나고, 구속을 벗어나 절대자유의 경지로 나아간다는 말도 영 와 닿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변화와 상승을 통한 초월이라니, 너무 거창하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내가 아닌 다른 존재로 화(化)할 수 있을까. 그림과 현실의 경계를 펄쩍펄쩍 뛰어 넘어 다니는 날렵한 전우치 도사처럼. 언제 어디서 주어진 조건을 벗어나 자유롭게 변신하는가.
그녀와 단 둘이 방 안에 있을 때! 나의 질문에 한 남학생이 짓궂게 답했다. 솔직함 속에 놀라운 진실이 들어있었다. 그의 말대로 우린 사랑하면 변한다. 때론 혀 짧은 소리마저 낸다. 오 마이 허니, 멀쩡한 인간이 꿀이 되고, 오 마이 베이비, 다 큰 성인이 아기가 된다. 이토록 꿈결 같은 연애의 순간들은 곤(鯤)이 붕(鵬)이 되는 대변혁과 다를 게 무언가.
자신만의 소요유 활동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수업시간, 누군가 축제 무대에 섰던 경험이 준 희열을 말하고 강의실에서 직접 랩을 했다. 소요유의 구체적 실천은 의외로 일상에 널려 있다. 사람들이 술을 진탕 마시고 자기 안에 숨어있던 또 다른 자아를 발산하는 건 좀 문제적이다. 허나 이 또한 한국인들이 ‘노는’ 방식 중 하나임을 부정하긴 어렵다. 이국적인 해변으로 여행을 가면 어깨를 드러낸 맥시 드레스를 입고 싶어진다. 좀 상투적일지언정 출퇴근길에 못해보는 것들을 해보는 건 즐거운 일이다. 고음을 내지르는 로커로 변신하겠다고 동전노래방에 드나드는 취미 역시 건강한 소요유다.
약자도 강자가 될 수 있고, 강자도 약자가 될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과 변화의 움직임이 자유고, 곧 삶이다. 한편 강자도 약자와 다르지 않고 약자도 강자와 같을 때가 있다면? 원래는 본질이 동일하기에 변신도 가능한 것이라면? 이 같은 상대적 재인식의 방법론이 제물론이다.
무엇이 큰 것인가. 수박? 코끼리? 비행기? 지구? 수박은 과일치고는 크지만 코끼리보다는 작다. 코끼리는 수박보다 크지만 비행기보다 작다. 스마트폰은 한 손에 쥐어질 만큼 작지만 도서관 한 채를 통째로 넣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지구 반대편의 사람과 대화하게 돕는다. 그렇다면 나의 크기는 어떠한가. 나는 얼마나 크고, 얼마나 작은가.
제물론은 만물(物)을 고르게(齊) 논(論)하는 것이다. 고른 만물을 논한다고 해도 좋고 만물을 고르게 본다고 해도 좋다. 이는 사물들이 반드시 똑같아야 한다거나 그것들을 고르게 만들자는 뜻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언어와 사유로써 그 제등함을 논의하자는 뜻임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다. 장자의 평등은 평등하게 보이는 가시적 결과를 물리적으로 만들어내는 것과는 별 상관이 없다. 그에게 평등은 이미 주어진 우주의 본질이며, 생각의 한계를 깨어가며 도달할 수 있는 새로운 인식의 영역이다. 제물론의 호접몽 파트를 연상시키는 영화 <아바타>에는 사랑 고백의 명대사가 하나 나온다. I see you. 나비족과 인간, 여전히 이물감 가득한 외양이지만 그들은 서로에게서 [같은 마음]을 보았던 것이다.
자유는 실체적으로 즐거이 살아가는 삶 그 자체이고, 평등은 이치를 깨달아가는 앎의 과정이니 서로 부딪힐 일이 없다. 나는 장자를 이렇게 읽는다.
송지연 우송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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