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른 옥수수를 손질하는 장족의 촌장 부친 황노인/사진=김인환 |
云南省 文山시 广南县 坝美村(운남성 문산시 빠메이춘)
사람들 말로는 운남성 한 쪽에 분명 도연명(陶渊明)의 작품 도화원기 (桃花源记)에 나오는 무릉도원(武陵桃园)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 곳이 어디인지 아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운남성 성(省)정부 문화국 직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문산시에 가면 자세히 가르쳐 줄 것이라고 했다. 곤명(昆明)에서 文山市까지는 직행버스로 6시간 거리. 머뭇거려야 할 이유가 없다.
오전 9시에 곤명서 출발한 버스가 예정보다 두 시간이나 늦게 文山에 도착했다. 비교적 도로사정이 좋은 상황에서도 이 정도 연착이면 대충 짐작이 가는 이야기다.
교통사정 얘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두 시간 이상 걸리는 시외버스의 경우 한 번도 고장이 나지 않았던 때가 없었다. 사전에 차량정비를 해놓았다면 이런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건만 늘상 이 모양이다.
승객들도 그렇다. 길가에 세워놓고 한 시간, 두 시간 고장난 부분을 수리하는 동안 한 사람도 불평불만을 털어놓는 사람이 없다. 마치 고장이 안 나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같다.
문산에 도착 즉시 시(市)정부가 아닌 문산시 정부를 찾아갔다. 중국의 행정기관은 우리나라와 조금 특이하다. 같은 市정부가 있고, 시를 애워싸고 있는 州정부가 또 있다.(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서부지역이 그런 경우가 많다.) 그리고 또 구(区)정부라는 것도 있다. 중국의 행정편제 소개는 다음 기회로 미루자.
성정부에서 소개받은 사람은 文山시 여행국 국장이다. 시내 변두리에 위치한 사무실을 찾는데 한 시간 이상이나 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정부청사 안에 각 부서가 모여 있는게 아니고 여행국이나 문화국 같은 부서는 청사와는 관계없이 엉뚱한 지역의 사무실을 임대해 쓰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 큰 청사, 텅 빈 방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모를 일이다. 대도시의 경우도 이런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힘들게 6층까지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채 올라갔건만 여행국장은 외출 중이었다. 3시간 거리의 市정부에서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중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무직원들의 퇴근시간까지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를 기다리는 사이 국장의 여비서에게 세계도원(世外桃源)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웃기만 한다. 그러더니 잠시 나갔다가 웬 남자 직원 하나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 직원은 반갑게 인사를 마치고 나자 내가 묻는 곳이 혹시 빠매이춘(坝美村) 쫭족(壮族)부락이 아니냐고 되묻는다. 부각이름까지는 모를 일이고, 도원경(桃源境) 같은 곳이라고 얘기만 들었다고 대답했더니, 그렇다면 빠매이춘이 맞을 거라며 국장님이 소상히 알고 있다고 한다.
여비서는 퇴근 준비를 다 마친 상태에서 상관인 국장도 오지 않고 또 낯선 손님이 와 있으니 애매한 모습으로 서성거린다. 웬지 모르게 나까지 불안하다. 내가 배낭을 챙기며 밖에서 기다릴 터이니 퇴근하라고 해도 괜찮다며 들었던 빽을 제 자리에 내려 놓는다. 그러면서 외국 사람 같은데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한국에서 온 작가라고 했더니 펄쩍뛰듯 반기는 기색이다.
한국은 말로만 들었다. 한국사람은 처음 본다. TV에 보니 한국 여자들 너무 너무 예쁘더라. 하면서 얘기 좀 나누고 싶다는 눈치다. 보기보다는 말이 많은 꾸냥이었다. 이런 저런 말대꾸를 해주는 사이 50대 중후한 사나이가 불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행국장은 성이 란(兰)씨였다. 희귀한 성을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곳이 중국이다.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인상의 兰국장은 첫 상면임에도 마치 수 십 년 지기나 되는 듯이 격식이 없다. 내가 권한 한국담배가 맛이 좋다며 세 개피를 줄담배로 피우기도 한다.
이미 내 마음을 꿰뚫고 있는 것처럼 이곳 文山시 내에선 반드시 두 곳을 가봐야 한다며 첫번째 코스는 广南县에 있는 壮族마을인 坝美村(빠매이춘)이고, 두 번째는 丘北县(추빼이쎈)普者黑(뿌저헤이)의 이족(彝族)마을이라고 한다. 특히 坝美村은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외부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곳이어서 사람들은 도원경(桃源境)이라고 부른다며 먼저 가 볼 것을 권유한다.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했더니 자기는 이미 선약이 있으니 염려 말라며 오늘은 이곳에서 자고 내일 일찍 富宁(푸닝)으로 가서 광남(广南)으로 가는 차를 갈아타라고 약도까지 그려준다. 호텔을 정하지 않았으면 자기가 소개해 주겠다며 내 대답을 듣지 않고 전화부터 돌린다.
이렇게 해서 여장을 푼 곳이 교통빈관(교통호텔). 360元 짜리를 80元에 할인해 준다. 여행국장 입김이 센 모양이다. 원래 요금대로라면 대도시의 3성급 호텔 수준이다. 너무 피곤해서 저녁생각도 없다.
▲ 장족의 부락에서는 수시로 소·돼지를 잡았다./사진=김인환 |
당나귀 요리로 포식
일찍 자리에 눕고 보니 너무 이르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어둑어둑해질 무렵의 文山市는 다소 어두컴컴하다. 호텔을 벗어나 번화가를 찾았다. 5분도 걷지 않아 제법 네온싸인이 번쩍이는 거리가 나온다.
중심지역이지만 서울의 변두리 지역보다 한산한 분위기다. 문득 눈에 띄는 식당이 있다. 말로만 듣던 당나귀 고깃집이다. 백 여 평방미터가 족히 될 홀 안엔 이미 절반 정도 손님이 북적거린다.
일단 발을 들여놓고 보니 처음 와 본 종류의 식당이라 어떻게 주문을 해야 하는지부터 난감하다. 빈 자리에 앉자마자 여종업원이 차를 따라준다. 그리고 무엇을 주문하겠냐고 묻는데 아뿔싸! 당나귀란 중국말을 미처 배우지 않았으니 어쩌랴. 종업원을 이끌고 문밖으로 나가 붙어있는 당나귀 그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간다.
이제 조금 있으면 음식이 나오려니 하고 기다리는데 이번엔 다른 아가씨가 와서 요리를 어떻게 해주면 되냐고 묻는다. 다시 난감해질 수 밖에 없다. 나는 잘 모르니 알아서 갖다 달라고 했는데도 이 아가씨는 알아 듣지도 못할 말을 계속 주절댄다. 멀찌감치서 보고 있던 주인이 다가와서 또 비슷한 얘기를 걸어온다. 하는 수 없이“나는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다. 당나귀 고기가 맛있다고 들었으니 네가 알아서 갖고 오너라.” 했더니 그제서야 둘은 물러섰고 잠시 후에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은 양의 고기접시가 놓여진다.
두 종류의 장을 놓고 가는데 아마 찍어 먹으라는 것이려니 하고 입맛을 보니 하나는 간장이고, 하나는 간장과 식초의 맵싸한 양념이 섞인 것 등이다. 일부 야채가 섞인 고기무침 쟁반은 언뜻 보기에 우리네의 두루치기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 점을 장에 찍지 않은 채 입에 넣어 본다. 무슨 양념을 했는지 약간 달짝지근한 맛이 든다. 고기 사이 사이에는 엄청난 양의 마늘과 생강이 곁들여 있어 독특한 맛을 내고 있다.
한참을 집어먹다 보니 이 좋은 안주에 빠진 것이 있구나! 하고 얼쿼토 한 병(56도짜리로 맥주 한 컵 정도의 양이고 값은 4元이다.)을 시켜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당나귀 요리를 즐겼다. 왕후장상(王侯将相)이 따로 없는지고!
어두운 거리에서 만난 노상강도
한 시간 이상 당나귀 요리에 한 잔을 즐기고 밖으로 나오니 찬바람이 일시에 몰아친다. 음력으로 섣달 그믐다운 날씨다. 종종 걸음으로 호텔 방향으로 길을 잡았는데 가로등 없는 거리가 생경스럽기만 하다. 저만치 호텔 상층부의 네온이 깜박거리는 것을 바라보며 발길을 재촉하는데 불쑥 시커먼 그림자가 양 옆에서 튀어 나온다. 순간적으로 아차 싶어 뒤를 돌아보니 한 녀석이 또 있다. 노상강도라는 걸 직감하는 순간이었다. 옆으로 뛰려고 하는데 한 놈이 잽싸게 어깨를 나꿔챈다.
“갖고있는 것 다 내놔!”
“…………………”
“그것부터 이리 내!” 하며 한 손에 들고 다니던 카메라를 빼앗는다. 옆에 녀석이 눈 깜짝 할 사이에 옆구리에 한 펀치를 날려온다. 욱! 하고 허리를 꺾다 보니 그다지 센 주먹은 아니로군! 하는 생각이 든다.
한 대 얻어맞은 배가 몹시 아픈척하면서 허리를 푹 꺾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녀석의 동태를 살폈다.
내 어깻죽지를 잡으며 두 번째 주먹이 날아오려는 순간, 잽싸게 허리를 펴며 내 젊은 시절 주특기인 헤딩을 날렸다.
퍽! 소리가 나며 녀석이 비실비실 뒷 걸음을 친다. 쫓아가서 오른 발 돌려차기를 한 방. 녀석이 쿵! 하고 나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다음 녀석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는데 내 등판으로 내리 꽂혀오는 몽둥이 세례. 나는 그 자리에서 고꾸라지고 말았다.
두 녀석 정도의 구둣발이 나를 위에서부터 내리 찍어댄다. 그 경황 속에서도 머리는 다치고 싶지 않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피했다. 잠시 숨을 고르면서 재차 날아오는 한 녀석의 발을 붙들고 있는 힘을 다해 끌어 당겼다. 생각보다 가볍다. 허리를 펴고 역공자세를 취했다. 나에게 한 쯕 발을 붙잡힌 녀석이 중심을 잃고 뒤뚱거리자 나머지 녀석들이 슬금슬금 도망갈 눈치다. 붙잡고 있던 녀석의 딴지를 걸어 보기 좋게 쓰러뜨리고는 걷어 차려다 보니 너무 어리다.
탁탁 손을 털어 보이며 일어나라고 손짓했더니 이 놈 역시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줄행랑이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녀석들이 시야 밖으로 사라지고 정신을 수습해 보니 빼앗긴 것은 카메라 한 대뿐이다. 중학생쯤 아니면 고교 초년생쯤 되었을 우범 청소년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카메라야 다시 사면되지만 그 안에 든 필름이 아까워 죽겠다.
석림(石林)의 이족(彝族) 사진들이 고스란히 날아갔다. 호텔에 돌아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니 뒤늦게서야 어깻죽지며 등짝이 욱신거린다.
‘고약한 녀석들!’
이튿날 아침 일찍 부녕(富宁)으로 출발하려던 일정을 늦췄다. 점포들이 문을 연 후에야 카메라를 살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오전 10시가 넘어 배낭을 짊어진 채 상가를 찾았다. 820元을 주고 중국제품 중에서 중간 쯤 되는 카메라를 한 대 샀다.
文山 버스터미널에서 富宁까지는 두 시간 거리. 도착해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콰이 찬」 5元짜리인데 먹을 만 하다. 우리네 습관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콰이 찬」 이다. 이름대로 해석하면 빨리 나오는 음식이란 뜻이데 중국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간편식이다.
십여 가지 이상, 많은 데는 20여 가지 이상 반찬을 준비해 놓고 그 중 세 가지를 주문하면 밥이 담긴 일회용 도시락 위에 얹어주는 식이다. 지역에 따라 가장 싼 곳은 2元,비싼 곳은 10元짜리도 있다.
한국 같으면 거지들이 먹는 양상이다. 식당 안에 좌석이 있어도 대부분 도시락을 들고 길가에 서서 먹거나 아무데나 쪼그려 앉은 채 먹기도 한다. 예쁜 아가씨들이 이런 콰이찬 도시락을 든 채 걸어 다니며 먹는 모습을 보노라면 한 마디로 ‘매력 빵점’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오후 1시가 넘었다. 차표를 끊으려고 매표소로 갔더니 표는 차에 타서 직접 끊으라고 한다. 중국의 소도시 터미널에서는 흔히 보는 일이다. 차에 앉은 후 차장(또는 운전기사)이 직접 돈을 받고 차표도 원하면 주고 가만히 있으면 주지도 않는다.
복잡한 중빠(中巴:대개 24인승)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겨우 广南에 가는 차를 찾았다. 막 떠나려고 부릉부릉 시동을 걸고 있는데 문을 못 닫을 정도로 대만원이다. 차 지붕 위에까지 짐이 가득 얹혀 있다.
‘다음 차를 타야겠군!’하고 돌아서려는데 누군가가 외쳐댄다. 저 차가 막차인데 놓치면 안 된다며 차에 매달리는 것이었다.
‘뭣이라고? 막차?’
나도 배낭을 추스르며 문 쪽으로 달려갔다. 기사는 오만 인상을 쓰며 안 된다고 소리를 지른다. 나 말고 두 사람이 더 문짝을 붙들고 늘어지니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문을 열어준다. 세 명이 더 오르려니 이미 탄 사람들은 안으로 밀릴 수 밖에.
어림잡아 24인승 버스에 40명 이상은 탔음직하다. 그래도 밀면 밀리는 물리적 변화가 가능한 시골 버스. 广南县까지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다. 차에서 내리니 온몸이 뻑쩍지근하다. 게다가 엊저녁 불량배들에게 몽둥이 세례를 받은 곳까지 욱신욱신 쑤셔온다.
배낭을 길거리에 내려놓은 채 맥없이 앉아있었다.
그런데 왠 낯선 사나이가 백지에 ‘한국인’이라는 글씨를 써들고 두리번거린다. 이 낯선 땅에서 나를 찾는 사람이 있다니? 저으기 놀란 표정을 짓자 그는 文山시 정부 여행국장의 전화를 받았노라며 악수를 청해온다. 란국장(兰局长)! 정말 고마운 사람이다. 도착시간도 정확히 알리지 않았는데 내가 도착할 것을 알았던 모양이다. 내 배낭을 빼앗듯 받아 들고 앞장을 서는 젊은이는 广南县정부 여행국주임육용( 陆勇)이다.
어느 차로 오는지를 몰라 오전에 도착하는 버스시간에도 나왔다가 돌아갔고, 막 버스인 지금 시간에 또 나왔노라고 반갑게 대해준다. 순박하고 시골 청년티가 온 몸으로부터 물씬 풍겨오는 陆勇주임.
먼저 간 곳은 그의 사무실(중국에선 빤꿍스办公室라고 부른다.)이다. 이곳도 역시 정부청사가 아닌 일반 건물 4층 한 쪽 방을 빌려 쓰고 있었다. 사무실 안에는 5~6명의 젊은 이들이 있다가 일제히 일어나면서 박수로 맞이해 준다. 그리고 차례대로 와서 악수를 청한다.
한 쪽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며 찻잔을 갖다준다. 그리고 담배를 권한다. 이들의 풍습가운데 고역이면서도 재밌는 것 중에 하나가 담배 권하는 모습이다. 자기 자신이 담배를 꺼내 혼자 피우는 게 아니라 꼭 옆 사람들에게 한 가치씩 뽑아주는 것인데 정중하게 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앞으로 던져 버린다. 처음엔 무례하기 짝이 없는지고! 하고 괘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이들 누구나가 자연스럽게 던지고 또 주워서 입에 무는 사람들을 보며 오랜 세월 몸에 익숙한 습관임을 알고 나면 그냥 무덤덤해지게 마련이다. 상대방이 지금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도 한 대 더 피우라며 담배를 던져주는 이들의 담배 인심.
잠시 후 이들은 나를 위해 저녁이 준비되어 있다면서 같이 나가자고 한다. 이들이 안내한 곳은 직원들 가운데 한 사람의 집이었다. 섣달 그믐의 차가운 날씨인데도 마당 한 쪽에 몇 개의 작은 화로들이 준비돼 있었고 화로를 중심으로 앉으면 엉덩이가 땅에 닿을 듯 말 듯한 작은 의자들이 놓여있다.
이미 약속이 되어있었던 듯 10여 명의 젊은 남녀가 앉아있다가 반갑게 이방인을 맞이해 준다. 훠꾸어(火锅)요리. 말로만 듣던 특이한 요리다. 우리들로서는 샤브샤브 요리를 먹어본 경험이 있다. 방법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큰 냄비에 양념이 된 국물이 가득 담겨져 있고 이것이 팔팔 끓을 즈음 야채며 고기(돼지고기, 닭고기, 소고기 등 종류는 다양하다.)를 차례차례 담갔다가 꺼내 먹는다.
술병이 나왔다. 언뜻 보니 32도짜리 백주(소주)이다. 어느 고장에서나 마찬가지였지만 이들도 역시 자기 고장 술이 최고라며 연신 권한다. 담배 권하기도 여전하다.
날이 어두워지자 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했는데 집 주인은 몇 개의 카바이트 등을 만들어 이 곳 저 곳에 놓아 준다. 겨우 옆 사람의 얼굴이 보일 정도의 밝기지만 이들은 이미 이러한 풍정에 숙달된 탓인지 전혀 개의치 않고 흥을 돋군다.
陆주임은 내 곁에 앉아 내일 가게 될 坝美村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장족촌(壮族村)으로서 최근에 발견된 동굴 때문에 세상에 알려진 마을이라는 것과 3백 여 명 전체 주민이고 3개 성(性)씨가 모여사는 壮族부락이라는 얘기다. 아직 전기도, 전화도 없는 글자 그대로 벽촌이라며 무척 고생스러운 곳인데 며칠이나 있을 생각이냐고 물어온다. 壮族에 대해 많은 것을 보고 싶다는 대답을 해주고 그들의 합창에 같이 박수를 치며 장단을 맞춰 주었다.
이튿날 아침은 나도 모르게 허둥대는 모습이다.
덜덜거리는 고물 승용차를 타고
한 마디로 坝美村으로 향하는 마음 때문에 들떠 있다는 증거. 陆勇씨는 여행국에 한 대 밖에 없다는 승용차를 내 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고마운 마음으로 뒷 자석에 올라앉으니 쌓인 먼지가 풀썩거린다. 매일 비포장 도로를 달리면서도 내부 청소를 하지 않는 그들의 습관이 조금은 거슬렸지만 눌러 참아야 했다.
이미 수 년 전에 폐차시켰어야 했을 고물 승용차는 덜커덩 거리며 한 시간 반을 달리고서야 대로를 벗어나 소로로 접어든다.
며칠 전에 내린 비 때문에 길은 질척거리고 얼마 못가서 바퀴가 진흙 구덩이에 빠져버린다.할 수 없이 차에서 내려 뒤에서 밀어올려야 했다. 이렇게 내리고 타기를 몇 번 하는 사이에 내 신발과 바지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30분쯤 지나자 마을이 보이고 입구에 世外桃源이라고 새긴 돌비석이 보인다. 마을이름이 世外桃源이라니? 글자 그대로 풀이한다면 세상 밖에 있는 복숭아골이 아닌가. 다시 말해 신선들이나 살고 있음직한 부락이란 얘기다.
부락 입구에서부터 차량은 통행금지. 배낭을 짊어지고 부락으로 들어섰다.
20여 호쯤 되어 보이는 고가(古家)들이 산비탈을 등지고 있었다.
너무나 평화스러운 마을이다. 한 쪽으로는 그 근원지를 알 수 없는 계곡물이 내를 이루며 흐르고 있고 마을 저 깊은 곳에는 아직 안개가 다 걷히지 않은 상태여서 환상적인 동양화 한 폭을 보는 느낌이다.
조금 더 지나치려니 이번에는 길 가에서 청년 몇 명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다. 자세히 보노라니 또 한 번 의구심이 일어난다. 이런 산 속 깊은 마을에서 배를 만들다니? 강이나 바다에서 필요한 배를 만드는 까닭은 무엇인가? 서투른 중국말로 동행한 기사에게 물었더니 껄껄 웃으며 조금 있으면 알게 된다고 말을 아끼는 눈치다.
5분쯤 지나자 마을이 끝난다. 내가 찾아온 마을이 바로 이 곳인가? 하고 이 곳 저 곳을 둘러보는 사이 기사는 벌써 저 만큼 앞장 서서 빨리 오라고 손짓을 한다. 그렇다면 저 앞 쪽에 또 다른 마을이 있는 모양이구나 생각하며 기사를 따라갔다.
갑자기 물 흐르는 소리가 세차지며 옆 사람과의 대화까지 삼켜버릴 듯이 요란해 진다.마을 건너편에는 깎아지를 듯한 바위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바위 사이사이에 기화요초(花瑶草)들이 매혹적으로 손짓을 한다.
점점 안개가 짙어지면서 어느 순간 작은 호수같이 많은 물이 고여있는 지점에 이르렀다.그 순간 나도 모르게 무릎을 쳤다. 몇 척의 떠 있는 목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산 속에서 배를 만들고 있던 모습들에 대한 의문이 한꺼번에 풀려 버렸다.
호숫가 저 쪽 끝에는 지름이 30미터쯤 되는 동굴이 보이고 물은 그 곳 굴 속에서부터 흘러내려 온다는 것을 직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 동굴입구/사진=인터넷에서 발췌 |
드디어 무릉도원에 도착
기사가 들고 온 내 배낭을 내려놓으며 조금 있으면 저 굴 속으로부터 배가 나올 것이다. 그 배를 타면 당신이 가고 싶어하던 坝美村으로 안내해 줄 것이다. 나는 여기서 돌아가야 한다.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바란다며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잽싸게 발길을 돌려 버린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꼭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다. 호수라기 보다는 연못 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은 그 너머에는 동굴이 있다.
동굴은 입구만 보일 뿐 캄캄한 입을 쩍 벌이고 서 있을 뿐이다. 구정을 나흘 앞둔 차가운 공기가 온몸을 애워 싼다. 그러나 물 위로부터 퍼져 오르는 물안개는 햇살과 부딪치면서 영롱한 색깔을 보여준다. 한 마디로 환상적이다.
어디선가 무료해진 신선이 물가에 내려와 낚싯대라도 던질 것만 같은 오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으려니 동굴 쪽에서 삐거덕, 삐거덕 하는 소리와 함께 물체가 그 형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작은 목선이었다. 청년 한 명이 노를 젓고 있었지만 흘러내리는 물살을 타고 있어서 방향만 조정하고 있슴을 쉽게 알 수 있다.
연못가에 매어놓은 목선 몇 척의 크기는 모두 그만그만 하다. 뱃사공을 제외하면 서너 명 정도 승선이 가능할 만큼 작은 배들이다.
청년은 서서히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와 큰 소리로 외친다. “빠메이춘으로 가렵니까?” 내가 그렇다고 하자, 그는 내가 배에 오르기 편하도록 육지에 배 옆구리를 갖다 붙이더니 시키지도 않았는데 껑충 뛰어내려 배낭을 집어 든다.
배의 선수를 돌리고 나자 노젓는 팔뚝에 힘이 들어간다.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야하기 때문이다.
드디어 목선은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한 치의 앞도 분간할 수 없으리만큼 칠흙같은 어둠이 꽉 차있는 동굴. 사공은 앞에 놓인 손전등을 켜보라고 주문한다. 동굴 속에는 방향을 알 수 없는 바람소리와 물결 소리뿐, 암흑세상은 더 할 데 없는 적막감을 안겨주고 있다.
손전등을 켰다. 건전지 수명이 다 되었는지 희미한 불빛이 넘실대는 물줄기 위로 퍼져 나간다. 그래도 워낙 컴컴한 동굴 속이었는지라 제법 윤곽이 잡힐 정도로 시야가 트여온다.
어떤 바위는 곧 떨어질 듯이 혹처럼 붙어 있기도 하고 또 어떤 것들은 각 종 동물모양으로 붙어있기도 하다.
사공은 이 곳 저 곳을 보라는 듯이 배를 갈짓자 형태로 저어 간다.
15분쯤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갑자기 햇살이 쏟아붓는 듯 동굴 안이 환해진다. 천정 한 쪽이 뻥 뚫린 지역이었다. 빛살이 점점 살아지면서 다시 적막강산 암흑세계. 온 것만큼이나 더 가서야 앞 쪽에 신천지가 밝아오듯 훤해지기 시작한다. 드디어 동굴의 저쪽 끝에서 이 쪽 끝에 도착한 것이다.
사공이 먼저 뛰어내리며 조심해서 내려오라고 배를 잡아 준다. 뱃삯이 얼마냐고 하니까 2元을 달라고 한다.
마침 갖고 있던 잔돈이 없어 10元짜리를 주며 수고했다고 하니까 거스름돈을 주려는 눈치다. 괜찮다고 만류해도 굳이 내 주머니에 쑤셔넣어 준다. 순박한 청년이다.
청년은 배를 떠내려가지 않게 고정시켜 놓은 후 내 배낭을 짊어지고 앞장을 선다. 다듬어지지 않은 돌계단(?)을 올라와 보니 저 멀리 부락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다음 주에 계속>
김인환 시인
김인환 시인은 시집<님의 마음에:1968년> (비가 내리는 :1970년) (다시 한밤에 돌아와:1973년) (시음집:1978년:한국 최초의 음반시집) (바람의 노래:1992년)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98년) (낙엽이 되어보지 못한 그대는;2013년) 등의 시집과 방송칼럼집 (내일을 향하여), 시론집으로 (마두금을 어디서 찾나) 등이 있다. 1972년 부산 최초의 시 전문지를 발간한 바 있으며 MBC, KBS, 한국경제 등에서 30여 년 간 언론인으로 활약했다. 부산 크리스천 문인협회 회장, 중국 광동성 한인문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 문인협회, 현대시인협회,국제 펜클럽, 대전 펜클럽 회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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