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니족의 천수답이 관광명소가 됐다.(사진=인터넷에서 발췌) |
아무리 둘러보아도 오가는 차량이 없다.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물으니 내 예상대로 사진을 찍고 있었노란다. 피사체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그만 밭고랑을 헛짚으며 발목이 삔 모양이다.
내게도 이런 기억이 있다.
이십 여 년 전 대관령에 스키를 타러 갔다가 발목이 삐었었는데 한 시간 쯤 지나자 마치 호박덩어리처럼 퉁퉁 부어 올랐었다. 결국 동행의 부축을 받아 거의 업히다시피 하여 하산, 병원으로 갔던 일이 생각났다.
그녀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우긴 했는데 걸을 수가 없다고 했다. 등을 내밀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업힌다. 망설임도 없다. 체면도 없다. 얼마나 아프면 그러겠나싶어 이해가 가기도 하지만 낯선 외국인에게 몸을 실려온다는 게 먼저 등을 내밀긴 했지만 당혹스러운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다행히 그녀는 몸체가 작고 가벼웠다. 그래도 초대소까지 업고 오는데 땀이 비오듯 흐른다. 광장에 있던 사람들이 우리들을 보고는 수근거리기도 한다.
등에 업힌 그녀는 창피한 것도 모르는지 3층 방에까지 올 동안 내려달라는 소리가 없다. 방 안에는 한 중년 여인이 있다가 깜짝 놀라며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알고보니 모녀지간이었다. 몸조리 잘 하라고 인사를 한 후 방을 나오려하자 두 여인이 동시에 나를 불러 세운다.
몇 번이나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음료수라도 한 잔 마시라며 캔 콜라를 내놓는다.
콜라 한 잔 쯤은 괜찮겠다싶어 받아 마셨다. 뜨뜻미지근한 콜라 맛이 그냥 설탕물 마시는 기분이다. 그녀의 어머니가 입을 연다.
이름은 장명명(張明明)이라고 했다. 딸의 이름은 이란(李蘭).
“혹시 이곳 가까이 의원이 없습니까?”
“나도 잘 모르겠소. 나는 한국인이오.”
내가 한국인임을 밝히자 모녀가 동시에 놀라는 기색이다. 그리고는 호기심어린 눈망울로 꽤나 진귀한 보물이라도 보는 듯한 시선이다.
“우리들은 13명이 북경에서 단체로 관광을 왔다. 蘭은 북경대학교 학생이며 취미가 사진 찍는 일이다. 마침 이곳까지 페키지 여행상품이 있어서 왔다.” 대충 이런 내용의 설명을 했다. 그러면서 한국 사람이 어째 이곳에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한국에서 온 작가이고 너의 나라 소수민족을 탐방하여 글을 쓰고 있다고 하니까, “원더풀, 원더풀”하며 蘭이가 영어로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딸아이를 업고 여기까지 와 주어서 고맙다며 점심에 초대해도 되겠느냐고 묻는다. 50세 전후의 이 여인은 목소리도 차분하고 제법 기품이 있어 보인다.
허기야 머나먼 북경에서 대학생 딸을 데리고 이곳까지 여행을 올 정도면 어느정도 수준있는 사람일 것이란 느낌도 든다.
기약없이 떠도는 김삿갓 입장에서 튕겨야할 이유가 없다 싶어 그들의 점심초대를 응하겠다고 하자 무척 좋아한다. 그러고 보니 이미 시간은 11시 35분을 지나고 있었다.
蘭을 위해 찬물에 발을 담그도록 하고 당분간 움직이지 않고 안정을 취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까 그러겠다고 착한 어린이처럼 대답한다.
明明은 식사 후 의원도 알아보고, 없으면 약을 사오겠다며 딸을 안심시킨다. 딸을 방에 남겨놓은 채 밖으로 나온 우리들은 잠깐 멈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식당을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대소 부근의 식당이란 콰이찬들이 대부분이고 조금 큰 집이라고 들어가면 파리들이 공중쇼를 진행 중, 불결하기만 하다.
明明이 몇 군데를 들락거리더니 조금 멀지만 저 앞 쪽에 있는 호텔로 가자고 한다. 10여 분 가량 숲 속 길을 걸은 후에 나타난 호텔. 겉으로 볼 때는 우람찬 건물이 내부로 들어서니 우중충하다. 손님도 없으니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지은지 무척 오래된 건물이다. 그 큰 식당을 우리 둘이 전세낸 듯 중간에 자리잡고 앉았다. 복무원이 주문을 하려고 왔다. 明明이 몇 마디 물어보고 있다. 둘의 대화를 들으며 이 호텔의 전신은 공산당 간부 휴게소였고 몇 년전에 민영화되어 호텔로 개조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생전 처음 보는 남녀가 그것도 낯선 곳에서 마주앉고 보니 쑥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明明은 매우 밝은 표정이다. 마치 오랫동안 잘 알고 지내온 사람처럼 스스럼없는 자세다. 중국여자들의 당당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남녀평등이 일반화된 사회라지만 외간 남자와의 첫 대면, 첫 대화에도 구김살이 없다. 그러면서도 간간히 소녀 같은 미소도 보여준다.
그녀의 질문이 쏟아진다. 한국에 대한 것들이다. 대장금이란 방송드라마를 감명깊게 보았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배우, 가수들의 얘기와 패션, 성형에 이르기까지 많이도 알고 있었다. 어떤 내용은 나도 모르는 부분이 꽤나 있을 정도다.
식당 분위기와는 다르게 음식맛은 좋았다. 자기들은 여행사에서 예약을 했기 때문에 초대소에 머물고 있는데 이런 호텔이 있는 줄 알았으면 초대소엔 안 갔을 것이라며 불평도 늘어놓는다. 나 역시 이들이 묵고 있는 초대소에 하룻밤 자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녀의 말에 공감이 간다.
이색적인 송별회
나는 소수민족 하니족(哈尼族) 촌장집에 묵고 있다고 하니까 불편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아무리 불편해도 그들과 같이 살아야 그들의 문화와 습관, 풍습 등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하니까 “직업의식이 대단한 분이시군요”라고 말하며 추켜세우기도 한다.
오늘 밤과 내일 밤까지 이곳에 머물게 된다면서, 내일은 한 시간 거리의 명승지를 다녀오면 하루가 꼬박 걸릴 터인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물어온다.
그것도 나쁠 것 없다 싶어 오늘 중에 출발시간과 모이는 장소를 핸드폰으로 알려주면 기꺼이 동행하겠다고 하자 손뼉을 치며 좋아한다.
방 안에 혼자 있는 딸아이가 걱정된다며 식사가 끝나는대로 서둘러 나왔다. 나오기 전에 호텔 종업원에게 부근에 의원이 있느냐고 묻자, 의원은 없고 침 놓는 집이 두 군데 있다고 친절하게 약도까지 그려준다. 딱히 급한 일도 없는 김삿갓 신세인지라 의원을 찾는 길에도 따라 붙었다. 침쟁이는 하니족 영감이었다.
초대소에 발목이 삔 환자가 있으니 같이 가 줄 수 없느냐고 하니까, 자기는 자리를 비울 수가 없으므로 환자를 데리고 오란다. 나머지 또 한 군데도 마찬가지 대답이다. 발목에 이상이 있어 걷지도 못하는 환자를 찾아가기는 커녕 오겠으면 오고 말겠으면 말라는 노골적인 콧대 앞에 은근히 화가 치솟는다. 그러나 답답한 것은 이 쪽이니 어쩌랴. 목 마른 자가 샘 팔 수밖에.
다시 초대소로 돌아가 방문을 여니 그 사이 蘭은 침대 위에 몸을 구긴 채 잠들어 있었다. 흔들어 깨웠다. 오면서 사들고 온 만두와 음료수를 내놓자 얼마나 시장했었는지 순식간에 먹어 치운다. 그들과 의논하지도 않았지만 응당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다시 등을 내밀자 자연스럽게 업혀온다.
소수민족 하니족 영감의 침 솜씨는 신통했다. 몇 군데 침을 꽂고 그 이튿날부터 조금 절뚝이긴 했지만 바로 걸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明明이와 약속한 명승지 탐방은 내 쪽 사정으로 같이 갈 수가 없었다.
그 날 많은 인원의 관광객이 들어오고 박물관 앞 광장에서 대규모 공연이 준비된다는 말에 솔깃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모녀는 하루종일 번갈아가며 여섯 차례나 전화를 해 주었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놀랍다는 얘기며 가이드가 들려준 전설 같은 얘기 등 거의 매 시간 마치 헤어져 있는 가족에게 하듯 전화를 해주었다. 돌아오면서 또 전화.
도착하면 같이 온 일행들과 저녁식사를 하게 되는데 그들 모녀는 나와 함께 어제의 그 호텔에서 따로 식사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마지막 밤이라는 얘기까지. 친구들끼리의 송별회라도 되는 양 우리들은 그렇게 호텔에서 다시 만났다.
어제 낮과는 달리 식당 안이 시끌벅적하다. 낮에 공연을 보러왔던 관광팀의 숙소가 바로 이 호텔이었으므로 저녁 식당도 분위기가 바뀔 수 밖에 없을 터였다.
明明이는 간편한 여행복 대신 우아한 차림으로 나타났다. 식사와 술도 주문한다.
이 고장에서 생산되는 48도 짜리 白酒였다. 한국 사람들은 이렇게 높은 도수의 술을 겁낸다고 하자 이들은 깔깔 웃으며 북경에선 50도가 넘는 술이라야 제 맛이 나는 걸로 안다면서, 먹기엔 조금 독하지만 빨리 깨고 뒷 끝이 없다며 권한다.
모녀의 주량이 대단하다. 금새 한 병이 바닥나고 두 병, 그리고 세 병째가 거듭되면서 蘭이는 술잔을 엎는다. 자기는 이제 그만 마시겠다는 표시다.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일어선 明明이의 걸음걸이도 조금은 흐트러졌다. (그러면 그렇지 술 앞에 장수가 있냐?) 明明이가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에 蘭이가 묻지도 않는 얘기를 한다.
큰 사업을 하던 아버지가 4년 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엄마가 고독하게 보낸다. 몇 번 재혼할 기회가 있었지만 하나뿐인 딸을 지킨다며 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이 있어서 경제적으로는 문제가 없다. 대강 이런 얘기들이었다.
화장실에 다녀온 明明이 조잘대다가 뚝 그치는 딸 아이를 보며 “너 나 없는 사이에 엄마 흉 봤지?” 하며 예쁘게 눈을 흘긴다.
“엄마가 과부라고 했지. 엄마가 과부인건 맞잖아요?”하며 응수하는 蘭이 천역덕스럽기까지 하다.
술 기운이 거나할 터인데도 마치 남자처럼 호기를 부리며 깐빼이를 외치는 明明이 한편으로는 귀엽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오늘 밤은 마지막으로 내일은 헤어진다는 얘기를 강조하기도 한다.
그날 밤은 참 많이도 마셨다.
석별의 저녁임을 강조하는 두 모녀와 마주 앉아 잘 되지도 않는 중국어를 갖고 많이도 떠들었다.
취중에도 그녀들은 북경에 오면 꼭 찾아달라는 얘기를 몇 번씩이나 반복했고, 나는 또 그러마고 약속을 반복했다.
그녀들을 초대소로 배웅하고 돌아설 즈음엔 이미 밤 12시가 다 되어서였다.
초대소 앞 광장에는 깊은 밤인데도 많은 관광객들이 나와 있었고, 이들을 상대로 하는 야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늦은 시간에 나와 보긴 처음이어서 신기하게만 보였다. 어디서 쏟아져 나왔는지 소수민족 하니족 아가씨들도 전통복 차림으로 나와 삼삼오오 짝을 지은 채 즐겁게 떠들며 청춘을 구가하고 있다. 꽃이 만발하니 나비 떼 역시 안모일 수 없잖은가. 총각들도 이들의 사이를 누비며 수작을 붙이기도 하며 흥겨운 모습들이다.
이들 사이사이에 섞인 관광객들은 여기저기서 번쩍번쩍 후래쉬를 터뜨리며 사진찍기에 바쁘다.
숙소로 돌아가려던 발길이 나도 모르게 그들의 무리 가운데 묻혀버렸다. 한 낮의 무더위가 거짓말처럼 가시고 서늘한 산바람이 기분 좋을만큼 왕래하는 시간이다.
▲ 하니족의 전통놀이 (사진= 인터넷에서 발췌) |
열정적인 춤사위
이튿날 오전에 출발하는 모녀와 일행들이 잠시 동안이었지만 정이 들었었나 보다.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하며 석별을 아쉬워하는 두 모녀. 나도 모르게 콧날이 찡해온다. 차가 떠나고도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어야 했다. 앗차! 오늘은 대공연이 있는 날이라고 했지! 서둘러 부락으로 돌아왔다.
삼백 여 명의 단체 관광객이 쇄도했다해서 큰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며 귀뜸해주던 촌장의 말이 떠오른다.
부락에 도착하니 관광객들과 동네 꼬맹이들까지 뒤섞여 장터를 방불케 한다.
드디어 둥둥둥둥 북이 울리고 광장 중앙 노천극장의 무대가 펼쳐진다.
공연은 모두 3부로 나뉘어져 있다. 1부는 8명의 전통복 차림 아가씨(꾸냥)들이 등장한다. 양 손에 밥그릇 하나씩을 들고 남자들이 두드리는 북 장단에 맞춰 춤을 춘다. 단조로운 것 같은데도 독특하다. 춤 사위 중간 중간에 쎄이! 쎄이! 하며 추임새를 넣는 꾸냥들의 합창(?)소리가 이색적이다.
광장을 몇 바퀴 돌면서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무녀들의 얼굴에는 줄줄 땀이 흘러내린다. 관중들의 요란한 박수소리에 더욱 신명나는 모습들이다.
2부는 남자무용수 10명이 등장하는 춤이다.
춤의 이름을 몰라서 내 나름대로 부채춤이라고 붙여본다. 한 쪽 손에는 부채를, 그리고 또 다른 손에는 나무 딱따기를 들고 원무를 그리며 추는데, 중간 중간에 오른 쪽, 왼 쪽 발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딱 따닥 딱딱!
딱따기로 박자를 맞추어 나간다. 힘이 있다. 춤동작이 크다. 소수민족 하니족의 환희를 표현하는 춤이라고 사회자는 마이크도 없이 큰 목소리로 설명한다. 전쟁터에 나간 장병들의 춤을 연상하리만큼 역동적인 춤사위를 보며 환희보다는 일종의 전율을 느끼게 하는 춤이다. 역시 단조롭지만 무언가 강열한 호소력이 있다.
3부는 이미 보았던 남여 혼성춤. 둥둥둥둥 대북의 리듬에 따라 12명의 남여가 소북을 두드리며 추는 춤이다. 중간에 웃통을 벗어젖힌 두 남자가 등장, 전체 분위기를 고조시켜 준다. 손발은 물론 온 몸을 흔들며 추는 열정적인 모습에 관중들은 감탄의 박수 또 박수.
이렇게 3부로 나뉜 공연으로 막을 내리지만 프로춤꾼들이 아닌 부락 청년들의 아마추어 춤꾼들이라는데 관중들의 반응은 더욱 뜨겁다.
뒤늦게 촌장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오늘 같은 대공연은 관광여행사의 사전 예약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공연비는 600元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50%는 부락기금에 넣고, 나머지 50%가 출연자들의 몫이 된다고.
남녀 춤꾼 18명에 6명의 스탭진. 모두 24명에게 300元을 나눠준다고 했을 때 1인당 돌아가는 출연료는 고작 13元이 안된다. 그래서 놀라웠고,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소수민족 하니족을 찾아준 외지인들에게 자신들만의 전통예술을 선보이려는 그들의 모습이 성스럽기만 했다. 대공연이 이 정도 수준이고, 지난 날 보았던 남여 혼성무용은 50元도 받고 많으면 100元도 받았다고 하니까, 출연료가 몇 元정도 였다는 얘기가 된다.
옛 상형문자 보존돼 있어
허기야 이들의 하루 임금이 평균 20元~30元 정도라고 하니 얼마나 곤궁한 삶을 살고 있는지 짐작이 된다.
그래도 밝고 맑은 표정들이다. 돈이 많고 적음이 결코 행복의 척도가 아님을 이들은 평소의 모습에서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하루는 이흑(李黑)이라는 부락민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닭요리가 별미였다. 그러나 나를 정작 놀라게 한 것은 1500 여 년 간의 족보를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족보상의 1대 조상은 이하비(李阿卑).
16세기경 신장(新彊)서부지역이 본래의 터전이었다는 소수민족 하니족이다. 1300여 년 전부터 계속되어온 타 민족과의 처절한 전쟁을 거치면서 밀리고 밀리다가 이곳 운남성까지 이르게 된 하니족.
결국은 평지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산상으로 이주를 거듭해야 했던 한 많은 민족이 아니던가. 이스라엘 민족의 수 백 년에 걸친 황야의 방황은 얘깃거리도 안될 만큼 장구한 세월의 민족방황기를 거친 하니족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1500 여 년 간의 족보를 보관해 왔다는 사실은 경이롭기만 하다.
물론 이들의 박물관에서 수 천 년 전 이 민족이 사용했었다는 상형문자가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보고 위대한 민족이었음을 느낀 적이 있었다.
17세기 말에는 하니족 자치정부를 세우고 청나라에 대항했었다는 위협적인 민족으로 기록돼 있는 하니족. 스스로 민족학교를 세워 문화와 전통을 보호육성하며 계승시키고 있는 이들의 민족의식이 놀라웠다. <다음 주에 계속>
김인환 시인
김인환 시인은 시집<님의 마음에:1968년> (비가 내리는 :1970년) (다시 한밤에 돌아와:1973년) (시음집:1978년:한국 최초의 음반시집) (바람의 노래:1992년)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98년) (낙엽이 되어보지 못한 그대는;2013년) 등의 시집과 방송칼럼집 (내일을 향하여), 시론집으로 (마두금을 어디서 찾나) 등이 있다. 1972년 부산 최초의 시 전문지를 발간한 바 있으며 MBC, KBS, 한국경제 등에서 30여 년 간 언론인으로 활약했다. 부산 크리스천 문인협회 회장, 중국 광동성 한인문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 문인협회, 현대시인협회,국제 펜클럽, 대전 펜클럽 회원으로 있다.
비창곡(悲愴曲)
그날밤은
해발 일천 칠백미터가 넘는
높고 높은 고지대에서 였습니다.
쓸어 담으면 좋게는 트럭 한 대가 넘을 마큼
숱한 별들이 창고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옆에 앉았는 소수민족 하니족 꾸냥은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별 셋 나 셋
한참을 세다가 흐느껴 울기 시작 했습니다.
몇 일 후면 시집을 가게 될 꾸냥이
치료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세상 떠난 어머니를 생각하며
언제 그칠지 모를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한 그루 나무도 용서치 않으며
산 정상까지 땅뙈기를 일구어 온
농투산이 하니족 부락
이것을 천국이라 부르며 관광객의 볼거리가 되고
외지인들이 몰려오면 하니족 꾸냥들은
전통복에 전통춤으로 돈을 받았습니다.
관광객을 인솔해온 여행사가 뚝 떼어 먹고
던져주는 노래와 춤의 대가는 몇 푼 안되었지만
현금을 만져볼 유일한 방법이 이것밖에 없었습니다.
비창곡이었습니다.
수많은 비밀들
한 번도 멈춰 서보지 못한 시간
20세기에서 21세기로 건너온
여인들의 신음소리
시간, 오늘은 누구를 위하여 줄달음인가
눈물, 빵 위에 바르면 영양이 되고
햇볕, 찬란한 슬픔으로 노래가 되는
그리운 사람도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적막강산 변방의 강
이름 모를 강물은 넘실넘실
잘도 흐르는데
나는 지금 어디로 흐르고 있는가
천 년 한을 되새김하며
소수민족 꾸낭은 강변에서
시간을 너붓거리고 있다
<위 작품은 이미 문예지에 발표>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