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소수민족 하니족의 아가씨들/사진=인터넷 발췌 |
이들이 안내한 숙소는 이 지역에서도 알아주는 大酒店(큰 호텔)이었다. 혼자 자기엔 황송할 정도로 넓은 객실로서 VIP용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긴장을 하고 마신 술이었는지라 방에 홀로 남게 되자 술기운이 일시에 올라왔다. 샤워실에 들어가 찬물을 틀어놓고 온 몸이 서늘해질때까지 물받이를 했다.
어느정도 숙취를 털어낸 후 침대에 고꾸라지듯 쓰러졌다. 이미 시계는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마악 잠이 들려는 순간, ‘딩동댕, 딩동댕’초인종 소리가 요란하다. 이 밤중에 누가 찾아온단 말인가.
눈을 비비며 방문을 열자 왠 낯선 꾸냥이 생긋 웃고 서있다.
"넌 누구냐?"
"……."
대답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겠다는듯이 성큼 안으로 들어서는 꾸냥.
밝은 곳에서 자세히 보려니 어디선가 본 얼굴로 낯이 익다. 옳거니! 낮에 들렸던 안마 아가씨로구나!
"네가 어떻게 여길 왔느냐?"
"가라고 해서 왔지요."
"누가 너를 이곳에 가라고 하더냐?"
"……."
이번에도 그녀는 생글거리며 말을 삼간다. 그리고는 상의를 잽싸게 벗어 던진다. 참으로 집요하구나. 외국에서 온 손님대접을 꼭 이렇게까지 해야만 직성이 풀린단 말인가.
그러나 이들의 환대방법이 이런 것만은 아니라는 걸 보여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알아 듣건 말건 엉터리 중국어를 총동원해가며 나는 현재 몸이 불편한 사람이다. 건강이 안좋다는 말이다. 네가 밤늦게 이곳까지 찾아와 준 것은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겠고 또 고맙다. 미안하다. 그냥 돌아가 다오.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고 나서야 그녀는 할 수 없다는 듯이 체념하는 눈치였다.
꾸냥을 억지로 돌려보내고나자 잠이 싹 달아나 버렸다. 샤워실에 가서 다시 찬 물을 끼얹고 침상에 누웠다. 내일을 위해서 꼭 잠을 자두어야겠기에 잠을 청하고 있으려니 요란한 전화벨소리.
수화기를 들자 어여쁜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건너온다.
"안마 받지 않으실래요?"
"필요 없습니다."
"보통 100元 받는데 50% 디스카운트해서 50元만 받을께요."
소수민족 촌으로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市정부 소재지, 縣정부 소재지 (鄕이나 鎭정부 소재지엔 없다.)등에서 묵게 되면 밤마다 불청객으로 찾아오는 전화 메시지를 이미 여러 번 경험한 바가 있어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다.
참으로 지겹도록 밀착공세를 펴고 있는 성문화가 깔려있는 중국사회가 염려스럽기까지 하다.
이튿날 아침, 습관처럼 새벽 6시에 눈을 떴다. 몸이 무거웠지만 이른 아침 산책습관은 어느덧 호텔 후원으로 거닐게 만든다. 싱그러운 공기를 맘껏 들여마신다. 갓 피어오르는 햇살을 받으며 우거진 수목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만 같다. 이름 모를 새들의 낭랑한 목소리들도 정겹기만 하다. 호텔의 크기도 크기지만 그 못잖게 정원이며 후원을 한 바퀴 도는데 무려 한 시간이나 소요될 정도였다.
아침식사가 호텔에서 제공하는 것인지 어쩌는지를 귀담아 듣지 않은 상태여서 호텔 로비로 들어가려는데 저만치서 "니 하오!"하며 반가운 인사를 보내는 사람이 있다. 가까이 오는데 보니까 예의 그 童국장의 남 비서다. 자기도 지금 막 도착해서 방으로 구내전화를 돌리려던 참이었는데 새벽부터 어디를 갔다오는 길이냐고 묻는다. 새벽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참이라고 하니까, 피곤하지도 않느냐며 놀라는 눈치다.
그러면서 2층에 있는 구내식당에서 7시부터 식사가 가능하니까 생각이 있느냐며 환한 웃음을 짓는다.
나는 당뇨병 환자여서 하루 세 끼 꼬박꼬박 챙겨먹지 않으면 힘들다고 댓구하고는 앞장 서서 2층 식당으로 올라갔다. 굉장히 넓은 홀이었다.
아직 아무도 찾지 않은 식당. 우리가 첫 손님이다. 뷔페식 식사였는데 한국의 최고급 호텔 수준임을 보고 놀라웠다.
그 가운데 인상적인 것은 한국의 김치. 이곳에도 한국인 투숙객이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간단한 양식 메뉴를 챙기고 김치도 덜어왔다.
그런데 맛은 아니올시다였다. 고추가루를 섞어 붉은 색은 띠고 있지만 설탕을 쏟아 부었는지 달콤 짭잘, 이상한 김치요리다.
식사 도중에 비서 왈, 한국인들은 김치를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알고 있기에 童국장이 호텔에 특별히 주문해서 만들도록 했다는 얘기에 입이 쩍 벌어지도록 놀랐다.
이렇게까지 세심하게 나를 배려하고 있었다니! 맛과 관계없이 듬뿍듬뿍 집어 먹어치울 수밖에. 결국 이 때문에 배탈이 나고 말았지만 말이다.
식사를 하면서도 계속 싱글 거리며 야룻한 미소를 날려보내는 비서 녀석이 밉상이다. 아마 ‘어젯밤 즈그들이 제공한 꾸냥과 얼마나 재미 있었느냐’ 하는 의미로 받아드리려니 알밤이라도 한 알 먹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꾹꾹 눌러 참았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인데 입구쪽이 왁자지껄하여 바라보니 童국장과 몇 명 일행들이다.
반갑게 웃으며 다가서는 童국장.
마치 오랜만에 만나는 오빠나 되는 듯 살갑게 군다. 같이 식사를 나누려고 왔는데 이렇게 일찍 시작할 줄 미처 몰랐노라며 서둘러 접시를 들고 나선다.
눈여겨 보자니까 계란후라이 하나, 딱딱한 빵 한 조각, 그리고 쥬스 한 잔이 그녀의 아침식사 메뉴다. 참으로 소식을 하는구나 싶다.
같이 따라온 남자들도 이곳 정부 요원들인데 모두가 童국장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내가 오늘 가게 될 소수민족 하니족(哈尼族)의 촌장으로서 어제 지시를 받고 밤늦게 도착했다면서 오늘 나를 안내하여 되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하나에서 열까지 빈틈없이 준비해주는 童국장이 새삼 고맙기만 하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숙소로 돌아와 배낭을 챙겨들고 1층으로 내려왔다.
"정말 힘드실 터인데 괜찮으시겠어요? 촌장에게 부탁은 했지만 힘드시면 언제든지 내려 오세요. 그리고 취재 마치고 돌아가실 때는 꼭 다시 들리세요." 마지막 악수를 하며 속삭이듯 건네는 童국장의 따뜻한 인삿말이다.
18개 支系로 나뉘어진 하니족
그들의 환송을 받고 올라탄 차는 지프차였다.
비교적 도로사정이 좋은 시골길을 달렸다. 점심 때 쯤 新平县에 도착할 때까지 촌장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소수민족 하니족(哈尼族)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듣게 되었다.
云南省 여러곳에 분포돼 있는 하니족이 약 120만여명 된다는 것과, 같은 하니족이라도 분파가 18개나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 가고 있는 곳은 玉溪地区琯 布度(Budo라는 민족이 사는 곳으로 이 역시 하니족 계열(중국 표현으로는 支系)이라고 한다. 모두 1만여명에 불과하지만 약 20%가 기독교 신자들이라는 특징이 있는 민족이었다.
新平县은 아주 작은 고을이었다. 높은 산을 오르기 직전에 있는 소도시로서 울창한 숲 속에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자리 잡고 있었다.
县长은 마침 출타중이라며 副縣長이 기다리고 있다가 반갑게 환영을 해 준다.
그가 안내한 식당은 하니족 전통요리를 하는 곳으로서 야채가 풍성한 식탁이었다. 닭고기 요리와 당나귀고기 요리가 별미였는데 많이 먹히지가 않았다.
식사 후 쉴 틈 없이 다시 출발했다. 그동안 나를 태워주었던 차는 되돌아가고 여기서부터는 사외버스를 이용해야만 했다. 촌장과 둘이서 24인승 버스에 올랐다. 에어콘 시설도 없고 예의 창문 몇 개는 깨지고 없는 낡을대로 낡은 차였다.
정상까지는 1500m가 넘는다고 하는데 그 높은 산을 10여 차례 빙빙 돌며 길이 닦여 있어 풍경을 감상하는데는 일품이었다.
더욱 장관인 것은 그 높은 산 아래에서부터 정상까지 나무라고는 한 포기도 보이지 않고 모두 천수답(天水沓) 논들이어서 정겨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묘한 인상을 풍겼다.
해발 1000m가 넘으면서 운무가 깔리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동안 올라왔던 아래 지역은 운무 밑에 깔려 보이지 않는다. 마치 天上과 天下를 구별해 놓은 듯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산 중턱은 역시 천수답이 이어지고 있을 뿐 간간이 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몇 명 보일 뿐이다.
정상까지 털털 거리며 올라온 24인승이 드디어 종점에 닿았다. 종점 옆에는 곧장 전망대가 조성돼 있는데 그 면적이 축구장 서너개쯤 될만큼 넓은 광장이다.
빙 둘러 철책이 둘러쳐 있고 곳곳에 망원경이 설치돼 있는 것이 보인다. 외국 관광객인 듯 보이는 남녀 수 십 명이 몇 그룹으로 나뉘어 天下를 내려다 보는데 하나같이 황홀함에 놀라 탄성을 지르고 있었다.
잠시후 촌장이 만면에 미소를 띈 채 묻는다. 오늘부터 자기집에서 묵어야 하는데 갑자기 연락을 받은 일인지라 방 정돈이 돼 있지 않다는 것. 그래서 오늘 하루 밤만 광장 한 쪽에 있는 초대소를 가리키며, 저 곳에서 묵으면 어떻겠느냐는 얘기였다.
"메이 원티."
무척 어려워하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내가 먼저 앞장 서서 초대소를 향했다.
3층에 가장 전망이 좋은 방으로 이미 예약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방안은 아직 청소도 되어 있지 않았고, 수도꼭지엔 물이 말라 있었다.
뒤늦게 달려온 복무원 아가씨가 두 개의 물통에 가득 가득 물을 채워 들고 온다.
뚜렷하게 미안하다는 표정도 없다. 수도가 고장 났으니 물을 길어다 주면 되지 않느냐는 투다.
다른 방이 없느냐고 물으니 모두 똑같다는 얘기. 덩치만 커다란 초대소일뿐 어쩌다 찾아오는 손님들 갖고는 운영이 어려운 모양이다.
뒤늦게 알았지만 10여 분 거리에 멋있는 호텔이 하나 있었다. 관광객은 주로 이 호텔을 이용하는 눈치였고 이곳 초대소는 젊은이들이나 외지의 일반 관광객들이 이용한다는 것이었다.
초대소의 하루 숙박비는 하룻밤에 50元(아침식사 없음)이고 호텔은 180元인데 아침식사가 제공된다고 했다.
지금도 의문인 것은 그당시 촌장이 왜 나를 호텔로 안내하지 않고 초대소를 권유했느냐는 것이다.
물론 숙박비는 누군가에 의해 이미 지불되어 있었다. 촌장은 1시간쯤 후에 다시 와서 저녁식사를 같이 하겠다고 하고는 휭하고 가버렸다.
두 동이의 물을 다 비워가며 샤워를 했다. 산 밑 동네는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렸을 시간이건만 이곳은 산꼭대기이다보니 아직 해 지기 전이다.
눕자니 잠이 올 것 같아 간단한 복장으로 카메라만 든 채 밖으로 나섰다. 아까 보다 몇 배나 되는 사람들이 광장을 오간다. 황혼 무렵의 광경을 촬영하기 위한 사람들임을 곧 알 수 있었다.
꼬리를 감추려는 태양은 아쉬운 듯 강한 빛으로 산하를 쓸어안고, 그 빛 속에서 천수답의 모습은 강열한 인상을 뿜어내고 있다.
H족의 괄시와 억압에 짓눌려 쫓기듯 윗 쪽으로 윗 쪽으로만 농토를 개간하며 살아온 소수민족 하니족.
그러나 지금은 지상에서 기묘한 볼거리로 각광을 받으며 관광자원이 된 하니족 삶의 현장.
정말 생각할수록 아이로니컬한 모습이 아닐수 없다. 수천 년전, 숱한 전란을 피해 이곳 산골 마을로 도망치듯 이주해 왔다가, 그나마 H족들의 착취와 억눌림을 피해 천상세계(?)로 탈주를 꿈꾸었던 하니족의 恨이 지금 저렇듯 운무(雲霧)가 되어 떠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 민족이든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뿌리내릴 때까지는 적어도 수 천 년이란 시간이 담겨있다.
이 기간동안 정치적인 문제, 또는 군사적인 문제로 민족이 송두리채 없어지기도 하고 다른 민족으로 통합되기도 한다. 고유한 문화가 사라지기도 하고 또 다른 문화와 접목되면서 새로운 문화가 태동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소수민족 촌을 전전하면서 가장 많이 느끼게 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부분이다.
어느때인가는 분명히 한 지역에 정착하여 나름대로 문화의 꽃을 피어왔을 소수민족. 그러나 지금은 중화인민공화국이란 대국으로 한데 어울리며 조화롭게 민족의 모습을 살려나가고 있다.
문자도 틀리고 언어도 틀리며, 습관 풍습도 각양각색이건만 중화권이란 큰 틀 안에서 오손도손 살아가는 모습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없잖아 있지만, 외양적인 모습으로는 그렇다는 얘기다.
중앙정부는 소수민족의 정체성을 살려나가도록 배려하면서 큰 정치를 해나가고 있으니 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 방문 중인 소수민족 하니족(哈尼族) 역시 다른 민족과 상이한 부분이 하나 둘이 아니다. 밀가루보다 쌀을 선호한다든가 노인을 공경하는 마음은 많은 민족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아오던 모습이다.
다른 소수민족에 비해 교육열이 무척 높은 하니족. 그래서 북경 중앙정부 요인 가운데 다수의 하니족이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이들이다.
은 제품 수공업으로 유명
내가 묵고 있는 곳은 촌장의 집이다. 촌장은 30대 중반으로서 노부모를 모시고 있었다. 어린아이는 두 명으로 아들 하나 딸 하나였다.
나이가 필자보다 어린 촌장의 부모는 이른 새벽 논밭에 나가면 점심시간에나 흙투성이인 채 돌아와 간단히 요기를 하고는 다시 나갔다가 해질녘에야 돌아왔다. 돌아올 때는 두 명 모두 나뭇단을 이고 지고 돌아오는 모습이 옛날의 우리네 농촌과 농부들을 연상케 한다.
촌장 부인 역시 하루종일 보이지 않다가 저녁시간에야 다시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뒤에 알고보니 은(銀)세공 기술자로서 가내공업 형태의 공장(?)에서 작업을 한다고 했다.
하니족은 손재간이 좋기로 소문이 나있다. 銀제품이 이들의 상품 가운데 으뜸으로 치는데 이 부락만해도 가내공업 형태로 만들어지는 은목걸이, 은팔찌 등의 은제품이 멀리는 북경, 상해 쪽 상인들이 와서 사간다고 한다.
이밖에도 소가죽으로 신발을 만드는 가내수공업이 발전해 있는데, 하니족들이 만든 가죽구두는 가볍고 탄탄해서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필자도 한 집에서 80元을 주고 한 컬레를 샀는데 너무 편해서 오래도록 신고 다닌 일이 있다.
마을 중앙에는 축구장 절반만한 공터가 있고 한 쪽엔 하니족 박물관이 있다. 마침 박물관 관장은 수 개월 전에 병으로 사망하고 공석이어서 촌장이 대리역할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작고한 박물관장은 60세가 넘은 노인으로서 학자였다고 한다. 손수 조상들의 유물들을 찾아다니며 수집도 하고 박물관에 소장된 내용들을 중심으로 책도 여러권 발간한 유명인사였던가 보다.
2층으로 된 박물관 안에는 옛날의 농기구에서 변천해온 복장류, 누렇게 바랜 옛날의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어서 소수민족 하니족의 어제와 오늘을 조명해 주고 있다. 복장도 보면 남여노소 별로 또 결혼식 등의 예복, 농사일 할 때의 작업복이며 평상복 등 세분화 되어 있다. 쫭족이며 먀오족, 야오족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투박하면서도 편리성을 도모했다는 느낌이 든다.
전시되고 있는 사진 가운데는 항일투쟁 당시의 모습들도 꽤 많이 있다. 박물관을 다 돌아보는데는 두 시간 정도면 족할 정도로 빈약하다는 인상을 받지만 그나마 이런 곳이 있기에 하니족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
항상 느끼는 일이지만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한 사람의 능력이 얼마나 주윗사람들이나 후세인들에게 영향을 끼치는지 모른다. 이 박물관 역시 작고한 관장의 노력과 능력에 의해 여타 중국인은 물론 외국인에게 소수민족 하니족에 관한 이해의 폭을 넓혀주고 있는 것이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무식하니까요. 관장이 안 계시니까 촌장인 제가 아침이면 문을 열었다가 저녁이면 다시 문을 닫는 일, 그리고 하루 종일 하는 일 없이 입구에 앉아 지키는 일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촌장은 겸손해한다.
▲ 중국 소수민족 하니족의 아가씨들/사진=인터넷 발췌 |
즉석 공연도 열리고
박물관 앞 마당에는 언제나 어린이들의 놀이터가 되곤 하는데 관광객이 몰려오고 그들의 요청이 있으면 바로 이곳에서 민속공연이 벌어지게 된다. 출연자들은 평소 대기하고 있는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이 부락의 청춘남여들로서 각자 평소의 일터에서 일하다가 필요시엔 전통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오는 식이다.
커다란 북을 중심으로 최소 8명에서 많을 때는 20여 명의 젊은이들이 둥글게 원을 그리거나 두 줄로 대열을 바꿔가며 춤을 춘다. 영화에서 보는 인디언 춤이 연상되기도 하는데 소수민족 와족이나라후족의 춤과 비슷하다. 공연시간은 대략 30분. 그러나 춤동작이 워낙 역동적이다보니 이들의 온 몸에는 줄줄 땀이 흘러내린다.
그 주위에 둘러서서 의자도 없이 관람하던 관광객들의 우뢰같은 박수를 받으며 이들이 퇴장하고 나면 관광객들은 운동장 입구에 있는 기념품센터에 몰려가 쇼핑에 들어간다. 기념품센터는 모두 여섯 집이 있다. 그런데 며칠동안 지켜보면서 느낀 점은 하나같이 상점주인은 H족이라는 것. 어찌하여 자기들 부락의 상권을 스스로 챙기지 못하고 H족에게 넘겨줘야 했는지 그 이유는 끝내 밝혀내지 못했다.
평소에는 조용하다가도 관광객이 오면(작게는 10여 명에서 많게는 수 백 명)갑자기 북적대며 활기가 살아나는 이곳 박물관 주변. 그러니 자연히 비 오는 날은 공치는 날로 아예 문을 열지 않는다.
처음 도착해 아랫마을의 운무를 감상하던 곳은 이곳에서 약 30분 거리다.
하루는 그곳에 가 보기로 하고 나섰다. 약 200미터 정도의 언덕을 오르면 그 곳에 도로가 있고 지나가는 차를 세워야 한다.
그날은 날씨도 덥지 않아서 걷기로 했다. 간혹 논밭에서 일하던 하니족들이 손을 흔들며 아는체를 한다. 이미 10여 일 지나다보니 저녁식사나 술자리에서 낯을 익힌 그들의 정겨운 모습이다. 두 번 쯤 산모퉁이를 돌고 보니 지나온 거리만큼 남았을 목적지가 시야에 들어온다. 잠시 서서 들고 온 물병을 빼들고 한 목음 마시려는데 바로 앞 쪽에 왠 여자가 퍼질러 앉아있는 모습이 보인다. 옷매무시로 보아 이 지역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가까이 가보니 여자가 고개를 돌려버린다. 얼핏 보기에 20대 초반이고 꽤나 값이 나감직한 카메라를 목에 걸고 있다. 게다가 필자와 같은 검정테 안경까지 쓰고 있다. 몇 발자욱 지나갔다가 고개를 돌리니까 그녀 역시 빤히 쳐다보고 있다. 그냥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되돌아섰다.
"이 외진 곳에 왜 혼자 있느냐?"
"………."
웃기만 하고 함구무언이다. 그러다가 앗차! 실수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발길을 돌렸다. 카메라를 목에 걸고 있다는 것은 아랫쪽으로 펼쳐져 있는 계단식 논을 촬영키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이곳 해발 1500m가 넘는 고지대까지 층층이 만들어져 있는 천수답 논들은 사진작품으로서 좋은 배경이 되고 있다.
다시 돌아서서 가던 길을 재촉하려는데 뒤에서 그녀의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 잠깐만요."
가까히 가보니 그녀는 억지로 일어서려다가 픽 쓰러지고 만다. 자초지종인즉 다리가 삐었다는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벌어진 일인지는 모르지만 통증이 심한 모양이다.
"미안하지만 차를 좀 불러주세요. 저는 저 앞에 있는 초대소에 묵고 있는데, 다리가 이 모양이라 갈 수가 없어요. 한 시간 전부터 기다리고 있는데 지나가는 차가 한 대도 없어요."라며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기세다.
갑자기 난감해지기 시작했다. (다음 주에 계속)
김인환 시인
김인환 시인은 시집<님의 마음에:1968년> (비가 내리는 :1970년) (다시 한밤에 돌아와:1973년) (시음집:1978년:한국 최초의 음반시집) (바람의 노래:1992년)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98년) (낙엽이 되어보지 못한 그대는;2013년) 등의 시집과 방송칼럼집 (내일을 향하여), 시론집으로 (마두금을 어디서 찾나) 등이 있다. 1972년 부산 최초의 시 전문지를 발간한 바 있으며 MBC, KBS, 한국경제 등에서 30여 년 간 언론인으로 활약했다. 부산 크리스천 문인협회 회장, 중국 광동성 한인문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 문인협회, 현대시인협회,국제 펜클럽, 대전 펜클럽 회원으로 있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