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수익 한남대학교 문과대학 학장 |
‘잘한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잘하는 것을 뜻할 수도 있지만, 흔히는 상대적인 의미 곧 ‘남들보다’ 잘한다는, 경쟁이 전제된 뜻으로 쓰인다. 잘해야 경쟁에서 앞서서 여유롭고 풍족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이 그런 바람을 낳는 것이다.
하지만, 잘해야 경쟁에서 이긴다는 믿음만큼 교육을 망치는 것도 없다. 왜냐하면, 경쟁은 교육의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교육은 무언가를 알게 하고 느끼게 하며 깨닫게 해서 아이들이 스스로 향상된 존재가 되게끔 돕는 것이지, 누군가를 이기게 만드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경쟁 교육이 비인간적인 결과를 낳는 이유가 그것이다. 같이 배우는 동료는 이겨야 할 대상일 뿐이기에 경쟁 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더불어 함께 살게 하는 사회성이 없어지고, 경쟁에서 탈락한 경우에는 안타깝게도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까지 생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아이들은 불쌍하다. “지금의 1분이 미래를 결정한다”는 모토 아래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잠시라도 쉬거나 딴 데에 관심을 가지는 것에 죄의식을 느껴야 한다. 교육은 알고 느끼고 깨닫는 즐거움을 주는 대신 경쟁의 승리를 위해 괴롭고 아파도 참고 또 참으라고 가르친다. 그 결과 잘 참는, 다른 말로 자신을 잘 학대하는 아이들이 우수한 학생으로 선별된다. 분명히 교육은 좋은 것인데 그 좋은 것으로 아이들을 학대하는 것이 현실이다.
경쟁 교육의 끔찍한 결과는 일본의 ‘히키코모리’ 현상을 봐도 알 수 있다. 30대, 40대가 되어도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이들은 경쟁 교육이 낳은 처참한 결과를 대변한다. 이들은 모든 사회적 관계가 경쟁으로 받아들여지기에 방 바깥의 경쟁을 아예 피하려 일체의 사회적 관계를 포기한 사람들이다.
경쟁 교육을 뒷받침하는 것은 ‘상대평가’라는 비교육적인 평가제도이다. 상대평가는 아이들을 경쟁의 순위대로 줄 세우는 것이 핵심이어서 아이의 존재 자체를 향상시키는 교육의 본질에 관심이 없다. 국가가 시행 주체인 수학능력시험도 마찬가지다. 등급제도로 상대평가에 따른 줄 세우기를 완화해도 결국은 현재의 수능은 국가 스스로 교육의 본질을 포기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수능 개편에서 상대평가를 폐지하려는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물론 이렇게 되면 좋은 학생은 어떻게 뽑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수학능력시험의 선별력이 떨어진 만큼 내신이 중요해지는데 고교 현장에서 상대평가를 고수한다면 결국에는 잘 사는 아이들이 더 혜택을 받는다는 지적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교육의 본질을 포기한 상태에서는 곁가지 논란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대평가로는 교육의 본질을 지킬 수 없다는 확고한 원칙을 세우는 것이다. 이 원칙하에 곁가지 논란을 해소할 방안을 수립하는 것이 필요하지, 부작용이 있다고 원칙을 포기하는 것은 앞뒤가 서로 바뀐 격이 될 뿐이다.
경쟁이 실체가 되어버린 교육의 문제는 사실 우리 사회의 구조가 승자 우선인 데서 비롯한 것이다. 아이가 잘하기만 원하는 부모의 바람도 이 승자 우선 구조를 부모들부터 거부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경쟁 교육의 승자는 능력과 지식이 출중해도 교양이 없다. 교양이란 더불어 함께 사는 인간다움을 갖추는 것인데, 교양이 없는 경쟁 교육의 승자는 승리의 혜택을 자신만을 위해 천박하게 누리게 된다. 경쟁 교육이 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패배한 사람들에게 천박한 우월감을 드러내는 승자들을 우리는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 하지만, 교육은 도리어 이런 사회 구조를 바꾸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경쟁 대신 인간을 향상시키는 교육의 본질 회복, 그것은 교육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을 바람직하게 바꾸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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