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영애 선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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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우 어린 나이 때부터 줄을 서는 법을 배운다. 유치원 버스에 오르기 위해서 도착한 순서대로 줄을 서고, 학교 급식실에서도 식사를 하기 위해 줄을 선다.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줄을 서는 것은 금기시 된다. 이른바 ‘새치기’는 사회적 지탄이 대상이 되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될 사회적 규범이다.
줄서기는 기본적인 공중도덕이자 공공예절에 속한다. 줄서기는 사회에서 지켜야할 가장 기본적인 예의범절임을 투영한 결과이기도 하다. 줄서기는 매우 단순하지만, 누구에게나 노력한 만큼 형평성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공정한 기회를 주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통원 차량에 오르기 위해, 식사를 하기 위해 줄서기를 시작하지만, 줄서기는 경쟁사회의 전반적인 부분에 적용되는 개념으로 확장된다. 중고등학교나 대학교의 진학도 사실은 능력에 따른 정당한 줄서기의 결과일 것이다. 취업을 하고 난 후 그 직장에서도 줄을 서야하는 일은 끊임없이 생긴다. 줄을 서는 데에 비정상적인 힘이 가해지면 형평성과 공정성이 위협 받고, 조직 내부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한국사회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입시 부정, 취업 부정들이 그러하다. 또 종종 학습 윤리나 연구 윤리 위배 같은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는 것도 결국은 적은 노력으로 부당한 이득인 좋은 학점이나 좋은 평가를 얻겠다는 심사에서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행위를 하는 이들의 대부분이 염불위괴(恬不爲愧)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고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염불위괴의 마음이 어쩌면 가장 큰 문제는 아닐까?
하고자 하는 일이 옳든 그르든 능동적인 행동의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블랙 리스트나 화이트 리스트와 같이 본인도 모르게 줄이 세워진 경우는 좀 더 심각한 문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본인도 모르게 누군가에 의해 내가 서야하는 줄이 결정되어 있다는 것은 매우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 블랙 리스트이든 화이트 리스트이든 말이다.
블랙 리스트란 주의나 감시를 필요로 하는 인물이나 단체를 적은 리스트이고, 화이트 리스트란 바람직한 것들을 적은 리스트를 의미한다. 그나마 화이트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게 되는 상황이라면 조금은 나은 경우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블랙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불평등한 처우를 받는 경우라면 누구에게나 매우 큰 상처가 될 것이다. 물론 나와 상관없이 화이트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가는 것도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한 일로 바로 잡아야할 일임에는 틀림없다. 특히 이번 블랙/화이트 리스트 사건은 무엇보다도 순수해야 할 문화계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그 충격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아리스토텔리스는 ‘공정’을 각자에게 합당한 몫을 주는 것이라 했다. 공정사회란 각자가 행한 만큼에 대해 온전히 그 보상을 해줄 수 있는 사회라 할 수 있다. 공리주의에서 ‘공정’이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 기여하는 것으로 정의되어진다. 다양한 입장과 논리로 회자되는 공정사회에 대한 의미도 중요하지만, 매우 원초적인 개념으로부터 공정사회에 대해 다시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줄을 선다는 것이 각자가 수행한 만큼의 몫을 오롯이 돌려준다는 의미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노력에 대한 대가를 받고 행복해 질 수 있는 사회, 더 나아가서는 각 개인의 행동이 사회 전반의 행복에 기여할 수 있는 선순환구조를 만들어 가는 공정사회로 발전할 수 있길 바란다.
정영애 선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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