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얘기도 그렇다.
그러니까 지난 주 목요일(2017. 7. 13) 오후 2시쯤 계룡서적에 가서 책에 대한 눈요기나 할까 해서 가수운 육교 정류장에서 급행1번 버스에 올랐다. 필자가 자주 가수원 육교 정류장을 글에 쓰게 되는 까닭은 필자의 집에서 정류장까지 1,2분 소요되는 짧은 거리 밖에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가수원 육교 정류장 다음 정류장에서 60대 후반으로 q이는 여자 분이 올라 탔다. 그러더니 운전석 뒤 세 번 째 자리에 앉은 필자 앞에 의자의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바로 필자 앞에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이 앉아 있다.
그러나 그 남학생은 노인으로 여기지 않았음인지, 아님 애초 자리 양보란 경노사상 자체를 모르는지 너무도 떳떳하게 고개 숙임도 없이 제대로 있다. 필자는 평소 십대나 이십대나 버스에서 노인들이 차에 오르면 대부분 자리를 양보하지 않고 제 볼일을 보면서, 특히 스마트폰에 열심히 기도 하는 걸 잘 연구(?)해 왔다. 필자가 4,5년간 꾸준히 지켜본 바로는 자리 양보라는 의식 자체가 없어 보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분명 필자의 잘못된 판단이고 착각이고 생각일 거라고 믿으면서.
그런데 운전석 바로 뒤에 앉아 있던 여학생이 앞에 안고 있던 가방을 둘러 메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필자 앞에 서 있는 별로 늙어 보이지도 않는 여자 분에게 자리에 앉으라 하는 게 아닌가. 아. 희열! 앞에서 말했듯이 거의 못본 채 하거나 무관심으로 자리 양보의 미덕을 이예 모르는 이 세태에 이 여학생은 자기 앞에 서 있는 것도 아닌 노인에게 스스로 찾아와 자리에 앉으라 하지 않는가. 이래서 세상은 살맛이 나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 여학생은 반대편에 가서 손잡이를 잡고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단정히 서 있는 것이다. 하여 필자가 조용히 그러나 이 학생이 들을 수 있는 톤으로 ‘학생’하고 불렀다. 그랫더니 이 여힉생이 알아듣고 필자 쪽을 쳐다 보았다.
그래서 필자는 왼손 ‘엄지’를 치켜세우고 두,세 번 흔들며 알아들을 듯 말듯한 목소리로 ‘최고’, ‘으뜸이야’ 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여학생 역시 밝은 미소띈 목례가 답으로 돌아 왔다. 참으로 기분 좋은 순간이었다. 마음 같아선 자리에서 일어나 필자의 명함을 건네 요즘 흔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어느 학교 몇 학년 몇 반 누구’인가를 알았으면 싶었다. 어찌 보면 아무것도 아닌 자그마한 선행같지만 요즘 같은 세태에 보기드문 선행 아닌가. 해서 이 여학생의 학교 담임선생님이나 교장선생님께 알려 칭찬이나 상찬을 해 본보기로 삼게 되었으면 해서다. 그 선행의 미침이, 물결이 점차 퍼져나가 아름다운 학생, 나아가 아름다운 청춘, 더 나아가 아름다운 성년이 되어지면 어찌 아니 좋겠는가. 이리되면 팍팍하기 이를 데 없는 이즘의 세태가 건강한 사회, 훈훈한 사회, 미소가 여울지는 사회. 미덕이 아름답게 꽃피는 사회로 아주 자연스레 이루어 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여학생이 서대전역 앞 정류장에서 내릴 때 다시 눈이 마주쳤고 필자는 다시 한 번 오른 손 ‘엄지’로 학생 ‘최고’ 라 말하고, 이 여학생은 아름다운 미소로 답례를 건네며 내렸다. 또 한 번의 미쁨의 순간! 바로 그거였다.
보나마나 들으나마나 이 여학생은 부모님에게는 효순일 것이고, 학교에서는 모범생임이 틀림이 없을 것이렸다. 미소 머금은 그 상냥함이 청량하기 그지없다. 아마도 이 여학생의 앞날은 주임의 은총으로 비단길일 것이라 여겨진다.
부디 그 그윽함과 겸양의 미덕으로 자신의 씨줄 날줄을 아름답게 수놓아 가기를 바라네요.
성도 이름도 모르는 이 아름다운 여학생에게, 또 이런 글을 쓰리라고는 전혀 모르고 지낼 손녀 같은 이 심성 고운 여학생에게 필자 할비가 찬사로 보낸다. 늘 건강하고 해맑은 낯빛이기를 바라네요. 아듀.
김선호 한밭대 전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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