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원에게 아버지 마탁소는 알 수 없는 존재였다.
아버지의 말은 들어보면 너무도 지당하고 옳은데 지키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간혹 “아버지 말씀은 옳으시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순원이 말하면 아버지는 벌컥 화를 냈다. 그래서 머리가 커지면서 가능한 한 아버지와의 대화를 피하곤 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존경할 만한 분이다.
아버지만큼의 독특한 생각과 가르침을 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아버지에 대한 여러 가지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있다.
순원이 5학년이고, 동생 수경이 3학년 방학 종업식이 있던 날 일이었다.
종업식 전 날, 담임선생님은 방학동안 집에서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며, 시계모양의 방학중 생활 시간표를 그리게 했다.
선생님은 순원의 시간표를 제일 예쁘게 잘 그렸다며 칭찬을 했다. 수경이도 잘 만들었다고 칭찬을 들었다. 그날 저녁 순원은 아버지에게 시간표를 보이면서 선생님에게 칭찬을 들었다고 자랑했다. 수경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시간표를 보던 아버지는 느닷없이 “얘들아, 그 시간표를 들어봐라”라고 정색하고 말했다.
영문을 모르고 남매는 시간표를 들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단호하게 지시했다.
“찢어라.”
남매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 저녁을 준비하던 아내 송원희가 놀라 말했다.
“아니, 무슨 소리에요. 아이들이 어제 저녁 내내 정성껏 만들었는데, 선생님이 칭찬하신건데 왜 찢어요?”
“선생님이 그리라고 하셨단 말이지. 그러면 그 시간표를 접어라. 접어서 다시는 보지 말아라.”
그런 다음 한동안 묵묵히 있던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순원아, 시간표에 네 아침 식사시간은 몇 시지, 그리고 수경이는?”
순원은 8시, 수경은 8시 반부터였다.
“아빠는 몇 시에 출근해야 하지? 그러면 엄마는 아침에 몇 시에 식사를 준비해야 하니?”
“아빠 출근 시간은 7시 30분이니까 아침은 7시쯤 드시잖아요.”
아들의 대답에 마탁소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엄마는 너희들의 생활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
순원은 그렇기도 하겠다 싶었다. 어떤 모순이 느껴졌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규칙적인 생활이라는 것을 시간으로만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순원이가 시간표대로 하루를 살려면 모든 사람이 아니, 지구가 너를 중심으로 돌아야 한다.
네 식사시간을 맞추기 위해 다른 사람의 식사시간을 모두 다시 조정해야 하고, 네가 오후 3시에 친구와 놀려면 어느 친구는 자기 시간을 포기하고 너와 놀아줘야 하고, 그리고 4시 반이면, 네가 무엇을 하고 놀았던 간에 너는 놀이를 그만두어야 하고, 네 친구도 그만두어야 한다.
6시 반에 저녁을 먹기 위해 수경이와 아빠는 일찍 집에 와야 한다. 아니면 너 혼자 먹든가. 순원이하고 수경이는 시계를 차고 다니니?”
“아닌데요.”
마탁소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단 하루도, 아니 단 한 시간도 이 시간표를 지키지 못한다. 너희들은 방학 첫날부터 스스로와의 약속도 지키지 못하는 게으름뱅이가 돼버리고 마는 것이다. 왜 처음부터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해서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드는 시간표를 만들어야 하겠냐?
그래서 그 시간표를 보지 말라고 한 것이다. 아버지가 시간표를 찢어버리라고 한 것이 절대 심한 말이 아니다.
다만, 선생님을 존경하기 때문에 접으라고 한 것뿐이다.
알겠니?”
아내 송원희가 의아해 하면서 항의조로 반문했다.
“그러면 아이들이 방학 동안에 규칙적인 생활을 하지 말란 말이에요?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누가 하지 말라고 했나.
규칙을 시간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잘못됐다는 것이지. 규칙은 어떤 규칙도 가능해.
몇 시에 공부한다고 정하지 말고, 몇 페이지를 공부한다는 것도 규칙이야. 시간을 규칙으로만 생각하다 보면, 시간만 때우면 다 된 걸로 착각할 수가 있어요. 언제 했느냐가 중요할 때도 있지만, 얼마나 했느냐가 중요할 때가 더 많은 법이거든.
시간에 맞춰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고 어렸을 때부터 배워왔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사회는 눈가림 사회가 되었는지 몰라.
적당히 시간만 보내면 봉급이 나오는 무책임한 사회가 바로 이 시간표라는 관념에서 출발되었는지 모른단 말이야. 생산성 없는 노사간의 문제도 결국 바로 너희들이 그린 그 시간표에서 생긴 것인지 모른다는 말이다…”
아버지는 친구들과 있을 때와 가족과 있을 때와 다른 2중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많았는데, 특히 식사할 때 그랬다.
예를 들어 아버지는 다른사람들과는 술잔을 돌리거나 밥을 먹을 때 까다로운 법이 없었다. 그러나 순원이와 수경이에게만은 유독 까다로웠다.
“모두 각자 앞 접시에 된장을 떠서 들어라. 찌개 속에 숟가락을 넣어서는 안된다. 알겠니?”
“그러면, 맛이 없어요. 뚝배기에 있을 때 제 맛이 나지. 그리고 한 가족끼리 어때요. 같은 밥솥인데…”
어머니는 애교까지 섞어서 아버지에게 말한다. 설거지도 귀찮을 터이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찌개냄비에 수저를 넣어 찌개를 먹는다. 아버지 친구들도 그런다. 할아버지도 그러셨다. 그러나 너희들은 안 된다.
너희들은 아버지와 국민이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한국에 태어났지만, 아버지와 너희들은 다른 국민이다. 아버지는 후진국 국민으로 태어났지만 너희들은 선진국 국민으로 태어났다.
우리는 어렸을 때 먹을 것이 없어서 세끼 끼니를 거르지 않고 먹을 수만 있었으면 그것으로 흡족했다. 흰쌀밥과 고기반찬은 생일날이 아니면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너희는 아니다. 너희는 우유를 먹으면서 자랐고, 자가용을 타고 유치원을 다녔으며, 비만 때문에 고기를 사주지 않는다.
우리는 먹기 위해 먹었다. 너희는 아니다. 같은 물 한잔을 마셔도 유리잔에 마시는 물과 밥그릇에 마시는 물이 맛이 다르다는 걸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음식에 배고파했지만, 너희는 문화에 목말라해야 한다.
그런데 아버지 같이 너희들도 찌개 그릇에 함께 수저를 넣는다?
있을 수 없다.
너희는 반드시 앞접시에, 그것도 된장찌개용 앞접시에 덜어 먹을 수 있어야 한다. 알겠냐?”
참 까다로운 아버지였다.
순원은 공부를 열심히 했다.
주위에선 그를 과학의 영재라고 칭찬이 자자했다. 과학고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순원이가 과학고에 합격하자 마탁소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순원아. 아버지는 비록 농대를 나왔지만, 가끔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내가 내린 결론은, 위대한 정치인은 한 사회의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사회가 아닌 온 인류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꾸는 사람은 바로 과학자들이었다.
스티븐슨이 증기기관차를 발명하고 벨이 전화를 발명하고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발명하자 세상은 무섭게 변하지 않았느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토대로 원자폭탄이 발명되자 제2차 대전은 하루아침에 끝나고 말았다.
인터넷 시대가 도래하면서 대통령이 바뀌고, 언어가 바뀌고, 사람들의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바뀌고 있다. 지구 전체가 바뀌고 있지 않느냐.
플라톤도, 예수도, 석가도, 공자도 이렇게 인간들의 생각과 삶을 바꾸지는 못했다. 인류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꾸고 인간의 세상을 온전히 지배하는 존재는 바로 과학자들의 발명 그것이었다.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라. 앞으로는 과학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제패한다는 걸.”
그러면서 마탁소는 마순원이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말 한마디를 덧붙였었다.
“말하자면, 정치인은 동물이고 과학자는 식물이다.”
(계속)
/우보 최민호
최민호 전 충남도 행정부지사는 전)국무총리 비서실장, 행정중심도시 복합도시 건설청장, 행자부 소청심사위원장, 행자부 인사실장, 충남도 기획관리실장, 2002 안면도 국제 꽃박람회 사무차장(운영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전)배재대학교 석좌교수, 공주대 객원교수, 고려대 객원교수, 국회의장 직속 국회의원 특권내려놓기 추진위원회 위원(2016)으로 활동했으며 현)홍익대 초빙교수이다.
단국대 행정학 박사, 일본 동경대 법학 석사, 연세대 행정대학원행정학 석사를 거쳐 미국 조지타운대 객원 연구원으로 활동했으며 영국 왕립행정연수소(RIPA)를 수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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