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지연 우송대 외래교수 |
제목부터 틀려먹었어요. “귀여운 당신의 수렵”과 같은 문구는 수식의 대상이 불분명하므로 잘 쓰인 문구가 아니래요. 당신이 귀여운 건지, 수렵이 귀여운 건지 모호하다고요. 하지만 아무렴 어때요. 그걸 모호하게 하는 게 나의 모호한 의도인 줄은 왜 몰라요.
처음엔 이름 모를 자그마한 토끼 한 마리 잡아왔어요. 머리끈에 달려 있으니 작을 수밖에 없고, 특정한 캐릭터가 아닌지라 이름 모를 토끼가 맞아요. 우리의 관계도 아직 호명되진 않았지만, 깡총깡총한 시간들이었어요.
우리 관계에도 점점 이름이 생겨났어요. 당신은 자꾸만 새로운 동물을 잡아왔어요. 진화심리학적으로다가 남자답게 말이죠. 스티치, 다람쥐 에비츄, 카카오프렌즈 라이언, 포켓몬스터의 꼬부기 등. 참, 무민은 하마가 아니고 트롤이라면서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가오나시는 공교롭게도 가장 아프고 힘든 시간에 주어졌어요. 가오나시란 얼굴이 없다는 뜻의 이름이지요. 괴상하고 어두운 모습의 가오나시가 지금은 나름 귀여운 캐릭터 인형으로 둔갑했듯 그 때 느낀 실망감과 외로움도 언젠간 앙증맞은 것이 되었으면 해요.
직접 사서 선물해준 것도 있지만, 대부분 인형뽑기로 뽑은 인형들이에요. 언제부터인가 당신의 수렵은 봉제인형을 사냥해 오는 것이 되었어요. 김홍중 교수는 저서 <마음의 사회학>에서 최후의 인간들이 영위하는 삶의 유형이 바로 귀여운 삶이래요. “가련한 안락 이외에는 삶에서 아무런 야망도 소망도 없는” 애완인간의 삶인 거예요. 참고로 “애완인간”이라는 표현은 장강명 작가의 에세이집에서 얻었어요. 그는 귀여운 존재와 귀여워하는 존재 사이에 힘의 불균형이 있다고 말해요. 그러니까 강한 자의 상징적, 물질적 권력에 의해 포섭된 것, 지배된 것, 길들여지거나 사육된 것, 혹은 정복된 것들이 귀여움의 대상이 된다는 거예요.
마침 방송미디어학과 학생들이 제게 키덜트와 피터팬 증후군에 대한 인터뷰를 요청했어요. 저는 대놓고 키덜트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자기 삶에 책임지는 어른일 거라고 동문서답 해버렸어요. 의식적으로 키덜트되길 즐기는 사람은 피터팬 증후군이 아닐 것 같아요. 피터팬이 되기로 한 자기 선택과 책임 하의 삶을 살고 있을 거니까요. 다시 말해 삶의 양식 내지 문화적 취향과 취미의 한 형태로서의 키덜트가 문제될 이유는 전혀 없다고 봐요. 그런 유희는 건강과 행복의 지름길일 수도 있어요. 남이 뭐라 할 일도 아니죠.
더 위험한 케이스는 자신이 처한 객관적 현실을 부정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에요. 폐쇄적인 커뮤니티에 모여 육신, 물질, 과학 등을 부정하는 이상한 신념에 사로잡혀 있기도 해요. 꿈의 나라에서 돌아오질 않아요.
딩크족도 광의의 키덜트 표상에 포함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자식 낳고 산다고 다 어른일까요? 글쎄요. 인형을 가지고 노는 키덜트가 아니라, 자식을 인형으로 취급하는 키덜트가 어디 ‘안아키’ 엄마들뿐이겠어요? 온 집안이 종교에 미쳐 어린 아이에게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을 저버리는 가르침을 주입하고, 멀쩡한 자아와 욕망을 죽여야 한다고 억압하며, 반복되는 세뇌를 통해 독립하려는 자식을 죄지은 수감자 취급하는 부모도 있어요. 우는 마음을 빼꼼 들여다봐주지 못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요. 미친 그들에게 자식은 그저 제단에 바치는 제물이자 재물이더군요. 차라리 인형을 가지고 놀지 그래요.
그 어떤 무서운 짐승도 다 잡아다 줄 듯했지만 실상은 인형뽑기 같았던, 한 ‘귀여운 사랑의 모험’을 위해 이 글을 남겨요. 오늘도 불켜진 상자 안에서 귀여운 인형들이 무력하게 기다려요. 인형들에겐 매일이 방탈출 게임이고 일생일대 모험이겠죠. 하지만 당신의 수렵은 이렇게나 귀엽고, 쉽게 흔들려 툭 떨어지고, 갇혀있고, 가볍고, 용감하지 않고, 안전했어요. 사랑도 사냥도 좀 그런 시절이에요. 우리에게나 모두에게나.
송지연 우송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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