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성광 국립중앙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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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있는 이나 없는 이나 할 것 없이 지갑을 닫고 내핍하며 고단한 노년의 삶을 자처하나 보다. 어떤 이들은 돈이 덜 들면서도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 어릴 적 뛰어놀던 산과 들이 있는 자연에서의 - 삶을 꿈꾼다. 산속에 오두막집을 짓고 산나물, 버섯, 약초를 캐며 살아가는 자연인 같은 삶부터 경치 좋은 시골에 전원주택을 짓고 텃밭을 일구며 사는 조금은 여유 있는 삶까지 형태는 다르지만, 자연에서 먹을 것을 얻는 슬로우 라이프를 동경하는 중년의 남성도 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도 원한다고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연에 새 터전을 마련하는 일은 평생을 직장에서 보낸 도시인에게는 무엇부터 손대야 할지 전혀 엄두가 안 나는 일이다.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 새 삶의 토대를 마련했다 해도 사들인 땅이 말썽을 부리거나 지은 집에 하자가 발생해 속을 끓이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귀농귀촌종합센터 등에서 컨설팅이나 초기 정착을 지원하고는 있으나, 도시를 아주 떠나지 않는 반도 반촌(半都 半村)의 생활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별 도움이 되질 못 한다.
자연에 살기를 원하는 사람 중에는 생활 터전을 완전히 시골로 옮기기보다는 도시 집의 규모를 줄이고 남는 돈으로 인근 전원에 농막이라도 짓고 양쪽을 오가는 삶을 희망하는 이가 많다고 한다. 텃밭을 일궈 채소와 밑반찬을 마련하고 닭과 염소를 키워 신선한 달걀과 우유를 얻을 수 있는 자연에서 대부분을 살면서 생활비를 줄여나가되 문명이 그리울 때는 도시에서 얼마간 보낼 수 있는 그런 생활이다. 이러한 생활방식은 정든 동네를 떠날 수 없다는 아내와도 타협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연에 살고픈 많은 장년 남성들에게 현실적인 대안이 되고 있다.
그러나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은 대부분 완전한 귀농·귀촌에 집중되고 있어서 도시에서 제2의 삶을 개척하지도, 시골로 완전히 떠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이들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나긴 여정을 그저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으로 대비하고 있다. 태어나서 공부하며 30여 년, 일하고 자식 키우며 30여 년을 보내고, 이제 30여 년이 추가로 손에 쥐어졌는데 아뜩하기만 한 것이다. 하얀 도화지를 줬는데 아이디어가 전혀 없고 물감도 바닥이 보인다, 턱 괴고 두 눈을 감으니 어릴 적 고향 마을 뒷산에서 친구들과 뛰어놀며 나무하고 칡뿌리 캐던 추억이 아스라하다. 그러나 “나 돌아갈래”라고 소리치며 달려가고픈 고향은 이미 여기저기 파헤쳐지고 개발되어 돌아갈 곳이 못 된다.
대한민국의 압축 성장을 힘차게 이끌던 수고한 가장들이 보너스로 받은 30여 년을 재미있고 유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울 방법은 없을까? 겨울이 오기 전에 한동안 반짝 따뜻해지는 인디안썸머 같은 날들을 이들에게 선물할 수는 없을까? 이제 막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베이비붐 세대의 또 다른 30년은 후속 세대가 짊어져야 할 짐이 될 수도, 고령화된 우리 사회를 건강하고 활기차게 만들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먼저 정부에서는 이들을 지원하는 법과 제도, 예산을 마련하고, 컨설팅과 초기 정착을 돕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지자체는 자체 보유한 땅을 내놓고 빈집을 현대식으로 고치고 전기와 도로, 상하수도 등 인프라를 갖춰 이들이 빈 마을에 들여와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하여야 한다. 마을에서는 자연에서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은퇴자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따뜻하게 맞아주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주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새 삶의 개척자들이 강한 의지와 열린 마음으로 이웃과 소통하며 한 걸음씩 자연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마침내 자연이 그들의 생활터전이 되어야 한다. 이들이 그곳에서 인생의 황금기를, 인디안썸머를 맞는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양성광 국립중앙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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