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korean.china.com |
만약 신께서 사람이나 동물들에게 아주 가까운 데 있는 것(눈썹)을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그런데 한번 보자. 자기 눈으로 자기 눈썹은 보지 못한다는 목불견첩(目不見睫)이라는 이 말.
中國(중국) 戰國時代(전국시대) 末(말) 法家(법가)의 思想(사상)을 集大成(집대성)하여 秦始皇(진시황)에게 크게 影響(영향)을 준 韓非(한비)가 쓴 ‘韓非子(한비자)’에 나오는 데 이야기는 이렇다.
중국의 춘추시대 말기 초(楚) 나라 장왕(㽵王)((재위 BC613~BC591)은 웅대한 포부를 지닌 군주였다, 그는 막강한 군사력을 키워 자신이 계획했던 부국강병의 뜻을 이루고 마침내 자신의 야심을 밝힐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문무백관들을 소집하고 말했다.
장왕: 오늘 과인은 여러분들에게 매우 중요한 뜻을 전하고자 하오, 이제 우리 초나라는 제후국 중에서 유일하게 나라살림은 물론 막강한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소, 지금까지 나라 경제를 부흥시키고 강력한 군대를 키운 것은 제후국을 토벌해 패권을 손에 넣기 위한 과인의 철저한 계획하에 이루어진 것이오, 그러므로 이제 때가 되었으니 여러 대신들에게 묻겠소, 현재 정세에서 어느 나라가 가장 적합하겠소,
예나 지금이나 아첨하는 자들이 왜 없으랴? 어느 아첨 잘하는 신하가 나섰다.
신하: 폐하 소신의 판단으로는 월(越) 나라가 우리 수중으로 넣기가 쉬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월나라는 정치 불신으로 나라가 어지러운 탓에 백성들의 원성이 높고 나라 살림이 어려워 궁핍한 생활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부 혼란을 틈타 공격한다면 일거에 정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우리 초나라가 자신들을 구원해 준다고 믿고 협조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초나라의 위상을 높이는 절호의 기회라 여겨집니다.
이 말에 장왕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흡족해했다, 그러나 어느 문제든 반대 논리도 있는 법. 이 반대 논리를 소홀히 해서 큰코 다친 위정자들이 한둘이 아닌 것을 독자들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며칠 후 신하 중에서 직언을 잘하기로 유명한 두자(杜子)라는 신하가 장왕을 알현했다, 그는 며칠 전 참석하지 못했지만 이미 월나라를 공격한다는 소문을 듣고 이제 겨우 안정을 찾아가는 시점에 또다시 전쟁으로 군사들은 물론 백성들을 고통과 불안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왕을 찾은 것이다.
두자: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越(월)나라를 치려하십니까? 월나라와의 전쟁에서 승산이 있다고 보시는지요?
그러자 호탕한 장왕이 껄껄 웃으면서 말하기를,
장왕: 그대가 알다시피 우리 초나라는 풍족한 가운데 강력한 군사력까지 보유했으니 월나라 하나쯤이야 일거에 점령할 수 있을 것이오,
왕의 말을 듣고 잠시 말이 없던 두자는 다시 질문했다,
두자: 폐하께서 그토록 월나라에 대해 자신을 가지고 계시니 특별한 책략이라도 가지고 계시는지요?
장왕: 아니오, 특별한 책략보다 신하들의 소견에 의하면 지금 월나라는 조정 대란이 일어나 정국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군대는 기강이 마비되고 백성들은 생활이 궁핍하여 원성이 높다고 하니 우리가 공격하면 일시에 무너질 것이므로 이는 하늘이 내린 기회라 생각되오.
논리에 밝은 두자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예로부터 언관(言官)이나 언론(言論)은 정론직필(正論直筆) 해야 하는 법. 묵묵히 장왕의 이야기를 듣던 두자는 조심스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두자: 폐하, 죄송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질문 올리겠습니다, 이 나라 만인의 군주이신 폐하께서 자신의 눈썹을 볼 수 있습니까? 臣(신)이 비록 어리석으나 사람의 智慧(지혜)란 눈과 같아서, 能(능)히 백보 앞을 내다볼 수는 있지만, 가까이 있는, 자기 눈썹은 보지 못하는 법입니다. 우리 楚(초)나라도 晉(진)나라에게 패배하여 수백 리의 영토를 잃었지 않습니까? 이는 兵力(병력)이 약해졌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도적들이 여기저기 날뛰고 있어도, 官吏 (관리)들이 이를 막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政治(정치)가 紊亂(문란)해진 탓입니다. 그러니, 나라를 수습하는 것이 더 급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越(월)나라를 征伐(정벌)하려 하니 이것이야말로 智慧(지혜)가 마치 눈썹을 보지 못하는 눈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두자(杜子)의 말을 보자. 논리상으론 그럴 듯하다. 한비가 그렇게 말한 것을 후대로 이어오면서 수많은 논객들이나 위정자들이 그 말을 인용해 아전 인수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비판적 사고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자. 남의 잘못은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자기 잘못을 볼 수 있다고? 천만에, 자기 잘못은 느낄 수는 있어도 볼 수는 없는 법이다.
잘못을 보고도 느끼지는 못한다면 그것은 공염불과 같은 것. 아주 가까이 있는 눈썹을 볼 수 있도록 신이 만들었다면 어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니 논객(論客)들과 위정자(爲政者)들이여, 한비가 에로든 이 고사를 이럴 경우에 인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데 그런 예화를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가?
다시 말하지만 가까이 있는 눈썹은 아예 볼 수 없도록 신(神)께서 만든 것이지 못 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마음에 새겨두길 바란다. 고사에 나왔으니까, 남들이 그렇게 사용하고 있으니까 어떠냐고? 그건 비판적 사고가 없다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는 것. 그러니 목불견첩(目不見睫)을 아무 비유에나 사용하지 말도록 해야 할 것이다.
김용복/ 극작가, 칼럼니스트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