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충식 논설실장 |
번역가들 세계에선 '부정한 미녀냐 정숙한 추녀냐'는 잘 알려진 기준이다. 이런 예가 있다.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이 일본군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낸다. 당시 일본 총리 스즈키는 이에 “우리 할 일은 그 통첩을 모쿠사츠(もくさつ)하는 것”이라고 했다. '할 말 없음', '노코멘트' 정도의 쓰임이었다. 만약 모쿠사츠가 경멸이 보태진 '묵살'로 보도되지 않았으면 원폭 투하는 피할 수도 있었다.
더 부질없는 기억을 더듬어보자. 최초의 조선과 미국 간 교섭은 '무시'로 시작된다. 왜 그랬는지는 1882년 조미(한미)수호조약 전의 김윤식이 설명한다. 이홍장에게 김윤식은 “외교가 없었으니 어찌 서양말과 글을 해독하는 자가 있으리오”라고 했다. 조선과 미국의 협상에 중국과 미국이 얼굴을 맞댔다. 중국어 통역과 필담으로 일부 의견을 조율했지만 미국과는 입 한번 뻥긋 못해보고 국제질서 속에 편입된 셈이다.
한문 실력은 득이 아닌 독이 됐다. 조약 제1조의 '필수상조(必須相助)'를 미국이 모름지기 도와주겠다는 약속으로 철석같이 믿었다. 서양말은 '왜가리가 시끄럽게 지절거리는 것' 같고 글씨는 '헝클어진 실 모양' 같다던 조선왕조실록에 아직 머물고 있었다. 그때에 비해 지금은 천지개벽이다. 영어 실력이 비영어권 국가 60개국 중 24위로 매겨지지도 하지만 가끔씩 결정적인 실수가 등장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정문도 오역이 넘쳐난다. 우체국 근무 공익요원이 군복무자, 공무원시험이 성인 의무시험, 시내버스가 시외버스로 바뀐 사례도 있었다.
모두 국격과 국익을 해치는 일이다. 프린스(prince)가 마키아벨리에서는 군주, 영화 '벤허'에서 족장, 유럽에선 귀족으로도 쓰인다. 작은 왕국의 지존인 대공(大公)도 프린스다. 이런 다중적 의미를 놓치고 '왕자'로 쓰고 본다. 대개 원문에 충실하면 정숙함으로, 어긋나면 부정함으로, 정돈된 문장은 미녀, 그렇지 않은 문장은 추녀라고 간주한다. 정숙한 미녀, 부정한 미녀, 정숙한 추녀, 부정한 추녀의 네 조합이 이래서 탄생한다.
대화를 하다 보면 부정한 추녀라도 어물쩍 넘어가줘야 할 일이 꼭 있다. “내가 투르에서 깊이 사랑한 여자가 떠오른다. 아름답지만 부정한 여인이었다.” 유려하지만 충실하지 않은 번역을 언어학자 질 메나주는 이처럼 솔직하게(?) 서술한다. 사교적 자리에선 직역의 정확함보다 의역의 미려함을 일부러 좇을 수도 있다. 국제관계라면 조르주 무냉의 채색 유리와 투명 유리 사이에서 고뇌할 일이 자주 생긴다.
지나친 정숙은 이 경우 죄(罪)일 수 있다. 그런데 미추 관계없이 또 다른 걸림돌이 우리 앞을 가로막는다. 바로 특수외국어 문제다. 가령 라오스 대통령과 회담한다면 라오스어, 영어, 한국어 순으로 거듭 통번역을 한다. 아랍어, 히브리어, 힌디어, 세르비아어 등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제1순위로 사라지는 해당 외국어학과와 함께 사라진다. 이것이 대학 구조조정의 실상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 필자는 미래를 예측하는 힘인 TQ(Trend Quotient·트렌드지수)의 변수 하나로 언어소통을 꼽는다. 굳이 '미추'나 '정절'의 문제만은 아니다. 을사늑약에 이르기까지 조선이 맺은 조약들은 온통 미사여구 범벅이었다. 영어권에서 아랍어를 중시했으면 9·11 테러가 안 일어났다는 가정법을 다시 끄집어낸다. 소수 특수외국어 인력 양성을 국정과제에 포함시키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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