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나들이] 오래된 골목길에서 내일을 찾다

  • 문화
  • 문화 일반

[문화 나들이] 오래된 골목길에서 내일을 찾다

소제창작촌 레지던시 6기 전시회 ‘녹음방초’를 다녀와서

  • 승인 2017-07-11 10:29
  • 한소민한소민


갑자기 소나기 쏟아지더니 어느새 뚝 그쳤다. 아무 기척 없이 와서 정신없이 퍼붓고는 내색도 않고 사라져 버렸다. 장마라 비가 오락가락했지만 그 이후 더 이상 비는 내리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덕분에 좁은 소제동 골목을 편히 오갈 수 있었고, 행사도 예정대로 잘 진행 되었다.

지난 8일 소나기 쏟아지던 날, 소제창작촌 레지던시 입주작가의 전시회 오프닝 행사가 있었다. 2012년부터 운영되고 있는 소제창작촌 사업은 시와 대전문화재단이 매년 작가들을 선별해 그들이 소제동 철도관사촌에 지내면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대전역 주변 관사촌들 중 1920년대와 30년대에 만든 집들이 아직도 온전히 남아있는 소제동, 그 의미있는 곳을 새롭게 살리기 위함이다.

올 봄부터 입주해서 작업을 하고 있는 6기 입주 작가들이 ‘녹음방초’란 타이틀을 달고 작품전시회를 열었다. ‘푸르게 우거진 그늘과 향기로운 풀’이라는 뜻처럼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100년이 다 되어 간다는 낡고 지친 건물을 싱그럽게 물들이고 있었다. 세월의 늪에 잠겨있는 깊고 허름한 골목, 이제는 사라지고 무너질 것들만 남아 있는 오래된 골목길에 푸른 청춘들이 뿜어내는 예술의 향기가 퍼지고 있었다.

그들은 지난 봄부터 내내 낡아지고 바래지는 이곳에서 생명을 찾고 예술의 빛을 키운 것이다. 씽크대 위를 장식한 쥐의 모형, 머리에 꽃을 꽂고 화사히 웃는 동네 아저씨의 사진, 나뭇가지가 얽혀 만들어진 들개, 눈물을 머금은 것 같은 누군가의 얼굴, 소제동을 노래한 시와 이야기들... 그들이 이곳에서 길어 올린 것들은 오래된 것에서의 새로움 들이었다.

전시회를 둘러보고 나서 서둘러 오프닝 행사장으로 가 보았다. 선풍기 몇 대가 부지런히 돌며 바람을 전해주고 있었고, 마을 어르신들과 아이들이 행사를 찾아온 외지인들과 함께 어우러져 골목 안을 채우고 있었다. 예전 우물이 있었다는 자리가 무대가 되었고 창작촌 작가들이 한 명씩 소개되었다. 축하공연과 함께 작가들이 정성껏 차린 잔칫상까지 조촐하게 마련되자 너나 할 것 없이 흥이 올랐다. 바로 그 즈음, 무대 바로 옆에 자리한 청양슈퍼 사장님이 등장하셔서 그 유명한 기타 솜씨를 뽐내며 열정적인 연주를 해주셨다. 그 곡에 맞춰 현대 무용을 하는 청년의 즉흥 공연이 이어지기도 했고 흥을 주체 못하신 청양슈퍼 사장님은 앵콜곡으로 기타를 치며 개다리 춤을 추는 묘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모두가 흥겨웠던 오프닝 행사였다.



소제창작촌 오프닝행사가 끝나자 소나기 같이 모든 게 사라져갔다. 한꺼번에 쏟아진 많은 사람들과 그들이 왁자하게 주고받던 많은 이야기들은 소나기처럼 갑자기 다 가버렸다. 골목길은 다시 고요해지고 텅 비어 버렸다. 하지만 소나기 지나간 자리는 그 전과는 분명히 달랐다. 이제 소제동이 오래된 골목길으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푸른 청춘들의 예술의 향기 속에서, 청양슈퍼 아저씨의 녹슬지 않는 흥 속에서, 아프고 쓸쓸한 기억을 묻고 새로이 돋아나는 푸른 잎들을 보게 된 것이다.

호수로 유명한 중국의 도시 소주(蘇州)를 닮았다 해서 이름 붙여진 소제호. 아름다운 연꽃들이 피어났고, 둥근 초가집 사이로 우암 송시열의 고택과 그가 만든 정자인 기국정이 있었던 그 호수는 일제강점기에 사라졌다. 2만평이나 되었다는 넓은 소제호를 메운 자리에 철도 노동자들의 숙소 관사촌이 세워졌다. 호수 위에 세워진 집들은 긴 세월의 물결을 견뎌내고는 골목길을 따라 물 흐르듯 담장을 맞대며 서 있다.

그 골목길 오래된 집들을 보며 누군가는 어릴 적 추억을 노래하고, 누군가는 가난하고 지쳤던 고달픈 삶을 떠올리고, 또 누군가는 소제호와 함께 우리의 얼을 파묻은 일제에 분노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예술가의 시선으로 오래된 골목을 새롭게 만들어 내기도 한다. 추억이 묻힌 곳에서 내일을 찾는 소제창작촌 레지던시 작가들이다.

한소민 문화활동가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올해 대전 분양시장 지형도 도안신도시 변화
  2. 1기 신도시 첫 선도지구 공개 임박…지방은 기대 반 우려 반
  3. "전국 검객들 한 자리에"… 2024 대전시장기 펜싱대회 성료
  4. 대전 도시철도 2호선 트램 연내 착공 눈앞.. 행정절차 마무리
  5. 대덕구보건소 라미경 팀장 행안부 민원봉사대상 수상
  1. 유성구학교밖청소년지원센터, 장관상 수상 쾌거
  2. 대전소방본부 나누리동호회 사랑나눔 '훈훈'
  3. 대전 중구, 민관 합동 아동학대예방 거리캠페인
  4. 크리스마스 케이크 대목 잡아라... 업계 케이크 예약판매 돌입
  5. 천안시 쌍용3동 주민자치회, '용암지하도 재즈에 물들다' 개최

헤드라인 뉴스


‘대전 보훈문화 선도도시로’ 호국보훈파크 조성 본격화

‘대전 보훈문화 선도도시로’ 호국보훈파크 조성 본격화

대전시와 국가보훈부가 업무협약을 통해 호국보훈파크 조성에 본격 나선다. 양 기관은 26일 정부세종청사 보훈터에서 보훈복합문화관 조성과 보훈문화 확산이라는 공동의 비전 실현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한다. 이번 협약식에는 이장우 대전시장과 강정애 국가보훈부 장관이 참석할 예정이다. 주요 협약 내용으로 대전시는 보훈복합문화관 부지 조성, 지방비 확보를 위해 적극 노력하고 국가보훈부는 보훈복합문화관 조성 국비와 보훈문화 콘텐츠 등을 지원해 보훈의 가치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공간 마련에 적극 협력한다는 내용이 담길 예정이다. 특히 이번 협약..

겨울철 다가오자 전기매트류 소비자 상담 폭증… 제품 하자와 교환 등
겨울철 다가오자 전기매트류 소비자 상담 폭증… 제품 하자와 교환 등

쌀쌀한 날씨가 다가오자 전기매트류 소비자 상담이 급격히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25일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가 1372소비자상담센터에 접수된 소비자 상담을 빅데이터 분석 시스템을 활용해 분석한 결과, 10월 상담은 5만 299건으로 집계됐다. 이는 9월 4만 4272건보다 13.6% 늘어난 수치다. 이중 소비자 상담이 가장 많이 늘어난 건 전기매트류로, 9월 22건에서 10월 202건으로 무려 818.2%나 급증했다. 올해 겨울이 극심한 한파가 몰아칠 것으로 예상되자 미리 겨울 준비에 나선 소비자들이 전기매트류를..

충남도공무원노조 "공부하는 도의회, 달라졌다" 이례적 극찬
충남도공무원노조 "공부하는 도의회, 달라졌다" 이례적 극찬

충남도공무원노조가 충남도의회 행정사무감사를 두고 이례적 극찾을 하고 나서면서 눈길을 끌고 있다. 충남공무원노동조합은 25일 '진짜 확 달라진 도의회 행정사무감사' 논평을 내고 2024년 행감 중간평가를 했다. 노조는 논평을 통해 "충남도의회 행정사무감사가 확실히 달라졌다"고 평가하며, "도민 대의기구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며 과거 과도한 자료 요구와 감사 목적 이외 불필요한 자료 요구, 고성과 폭언을 동반한 고압적인 자세 등 구태와 관행을 벗어나려 노력했다는 점을 높이 샀다. 충남노조는 "사실 제12대 도의회는 초선 의원이 많..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시민의 안전 책임질 ‘제설 준비 끝’ 시민의 안전 책임질 ‘제설 준비 끝’

  • ‘백일해 예방접종 하세요’ ‘백일해 예방접종 하세요’

  • 롯데백화점 대전점, ‘퍼피 해피니스’ 팝업스토어 진행 롯데백화점 대전점, ‘퍼피 해피니스’ 팝업스토어 진행

  •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