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노기노 신사는 붉고 붉은 소나무로 지어졌다.
일반인에게는 공개 되지 않는 후루마쓰 일가의 내밀한 전대 신사.
전설에 의하면, 후루마쓰의 시조는 한 불상의 조각가였다고 했다.
그 이름은 전해지지 않았지만, 깊은 불심이 아니면 부처님이 몸을 현신하지 않는 고로 후루마쓰의 시조는 매일같이 공양을 하면서 불상의 조각에만 전념을 해 왔다.
극락정토를 그리며 108번뇌에서 해탈할 것을 지성드리며 그는 불상 조각을 위해 산중의 질 좋은 나무를 구하길 바랐다.
하루는 공양하는 절의 주지스님이 황금으로 만든 미륵불의 모습을 보여주며,멀고 먼 곳에 있는 절의 귀하신 스님의 부탁이라며 이와 똑같은 불상을 나무로 조각해 줄 수 없겠느냐는 부탁이 있었다.
스님이 보여주는 미륵불을 눈을 들어 보았다.
찬란한 영휘.
황금으로 만든 미륵불은 쳐다보자마자 너무도 눈이 부셔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다. 미륵불의 몸에서 나오는 금빛이 너무도 찬란하여 쳐다 볼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미륵상의 광배(光背)에서 나오는 그 신비하고 숭고한 분위기는 산사의 모든 빛을 일시에 거두어들였다.
오른 손을 턱에 고이고 오른발은 왼발 허벅지 위에 얹고 고개를 살풋이 숙여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미륵상의 지고지순한 자태라니….
시조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미륵상의 아름다운 모습과 찬연히 빛나는 금빛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단 한번을 바라보고도 망막에는 금빛 미륵불의 상이 또렷이 새겨졌다.
주지 스님은 황금 미륵상을 한번 보여주고 거두어가고 말았는데, 시조가 아침이 되어 눈을 떠보니 눈앞에는 미륵불만이 보일 뿐, 눈을 감아도, 떠도, 미륵불의 금빛으로 빛나는 모습만 보일 뿐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지면서 그는 끝도 없는 심연에 빠지는 듯 적막 속에 쓰러지고 말았다.
온몸이 뜨거운 열에 불타며 아무 것도 볼 수 없었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동안이나 다른 세상에서 머물다 왔을까.
그에게 변화가 생겼다.
눈이 밝아지고 손이 날카로와졌다.
세상은 고요했다.
사람들은 말했다.
그가 들을 수 없다고…
귀가 멀었다고…
시조는 자신의 눈 망막에 깊게 새겨진 미륵상을 오매불망 그리며 불상을 다시 현현해시키기 위해 산을 오르며 나무를 찾기 시작했다.
똑같은 목불상을 만들고자 하였다.
온 산을 헤매던 그는 마침내 미륵불의 크기에 어울리는 나무를 하나 찾았다.
그 나무는 솔잎 향기를 가득 머금고 조각하기에 적당한 물기를 품은 붉은 소나무였다.
붉게 빛나는 한 아름 가득한 단단한 소나무를 두 팔로 부여안고 그는 부처님께 불공을 드린 후 소나무를 베었다.
베어진 소나무에서 솔방울을 찾아 그 씨를 받아두고, 그는 다시 보지 않아도 보이는 황금 미륵불을 낮과 밤을 새며 조각하기 시작하였다.
황금 미륵불은 그로부터 석 달이 걸려 완성되었는데, 조각된 미륵불과 황금 미륵불은 쌍둥이처럼 똑같았다.
소나무 미륵불을 받아 든 스님은 너무도 흡족하여 그에게 큰 상을 내리면서 이 미륵불이야말로 미륵보살이 지상에 현신한 것만 같다고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소나무 미륵불은 어디론가 보내지고 말았다.
바다를 건너 귀하기 이를 데 없는 절에 공양되었다는 소식만을 주지 스님으로부터 전해들었다.
시조 할아버지는 황금 미륵불과 똑같은 나무 미륵물을 다시 하나 새기려 하였지만, 그 다음부터는 황금 미륵불의 잔영이 떠오르지를 않았다.
그와 비슷한 미륵불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는 평생을 귀머거리로 살았다.
아내의 봉양을 받아가며 그는 그 뒤에도 미륵상을 제작하며 살아갔지만, 삶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
그는 주지스님에게 간절하게 부탁했다.
죽기 전에 그 소나무 미륵상을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보게 해달라고.
스님은 그의 소원을 들어 주었다.
스님은 그의 손을 잡고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 절에 모셔져 있는 그의 소나무 미륵상을 보게 해주었고 후루마쓰의 시조는 자기가 만든 미륵상을 본 그 자리에서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마지막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일본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산에 묻어주면서 그가 가지고 있던 미륵상의 소나무 씨앗도 함께 묻었다.
그 씨앗이 싹을 터서 자란 것이 바로 아마노기노 신사에 있는 신목, 바로 천 년 후의 먼 후손 후루마쓰가 경배해 마지않는 그 신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후루마쓰가의 후손들은 그 미륵불은 1000여년이 지난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고 했다.
독일의 대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이 조각상을 보고 감탄을 금치못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실로 완전히 인간실존의 최고 이념이 남김없이 표현되어 있다……
이 불상은 지상에 있는 모든 시간적인 것과 어떠한 형태의 속박을 초월하여 도달한 인간존재의 가장 청정한, 가장 원만한, 가장 영원한 모습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후손 후루마쓰는 믿고 있다.
자신의 선조의 선조였던 시조 할아버지가 조각한 미륵상이 바로 일본국보 1호 목조반가사유상이라는 것을.
▲ 일본의 국보 1호 목조반가사유상 |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전설을 통하여 그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자기와 자기의 할아버지들은 모두 일본 땅에 살아 왔지만, 그 피는 신라인의 피라는 것을…….
코류지(光隆寺)에 안치되어 있는 저 목조 반가사유상은 일본에는 없는 나무로 새겨져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나무는 바로 아침마다 공양하며 경배하는 신사에 모신 저 신목, 신비한 붉은 소나무라는 것을.
그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은 몰랐었다.
학문적 분석과 문헌의 해석 그리고 우연의 결과로 불과 20년 쯤 전부터 사람들은 깨닫기 시작했다.
목조 반가사유상은 서기 623년 무렵 신라에서 제작되어 일본에 전하여졌다는 사실이 퍼지기 시작했다. 근거는 간단명료하였다.
첫째, 재료가 붉은 소나무, 적송이었던 것이다.
일본의 다른 목조 미륵상은 대부분 노송나무(히노끼)로 만들어졌다. 일본에 적송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재질이 다르다.
이 나무는 아니다.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맞닿는 곳, 신라 땅이 적송의 집산지였던 것이다.
둘째, 제작기법이 일본의 방식과는 다른 것이었다. 일본의 초기 반가사유상은 나무의 외피로부터 내부를 향해 조각하였는데, 코류지의 반가사유상은 목심에서 조각을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라의 기술이었던 것이다.
셋째, 코류지의 반가사유상은 통나무 한 토막을 깎아서 만들었다.
그 당시 일본에서는 이만한 미륵상을 조성하려면 신체의 여러 부분을 따로 만들어 조립했다.
넷째, 코류지의 창건주는 하타 가와가쓰(秦河勝)라는 신라계 호족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국보 83호 금동미륵 반가사유상.
바로 모델이 된 어머니 황금 미륵불인 것이다.
▲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 83호) |
일본 코류지의 반가사유상은 20여년 전 한 젊은 관람객이 갑자기 대좌로 뛰어 올라 꼭 껴안았는데 이 헤프닝에 의해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떨어져 나갔다. 그는 이 손가락을 잽싸게 갖고 도망쳐 버렸다.
범인은 반가사유상을 연모한 대학생이었다.
그는 일본 국민의 진정서가 쇄도하여 가벼운 처벌을 받았지만, 이런 과정에서 부러진 손가락을 정밀 조사해보니 그 결과 이 나무가 한국의 적송이라는 것이 확고하게 밝혀졌던 것이다.
이제 후루마쓰와 함께 코류지의 반가사유상이 신라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후루마쓰 시조의 이야기는 신화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계속)
/우보 최민호
최민호 전 충남도 행정부지사는 전)국무총리 비서실장, 행정중심도시 복합도시 건설청장, 행자부 소청심사위원장, 행자부 인사실장, 충남도 기획관리실장, 2002 안면도 국제 꽃박람회 사무차장(운영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전)배재대학교 석좌교수, 공주대 객원교수, 고려대 객원교수, 국회의장 직속 국회의원 특권내려놓기 추진위원회 위원(2016)으로 활동했으며 현)홍익대 초빙교수이다.
단국대 행정학 박사, 일본 동경대 법학 석사, 연세대 행정대학원행정학 석사를 거쳐 미국 조지타운대 객원 연구원으로 활동했으며 영국 왕립행정연수소(RIPA)를 수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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