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 우난순 기자 |
소유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소유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가 카를 마르크스는 “사치야말로 빈곤과 마찬가지로 큰 악덕이며, 우리는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요롭게 존재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찍이 선지자들도 소유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했다. 예수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라고 말했다. 석가모니 또한 인간으로서 자기도야의 최고 단계에 이르려는 사람은 재물을 탐해서는 안된다고 설파했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꽃에 대한 비유를 통해 소유와 존재의 양식을 말했다. 꽃은 꺾음으로써 소유하게 되지만 파괴되고 다만 바라보기를 통해 하나의 '존재'가 됨으로써 꽃은 죽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자신을 열어서 비우는 것. 이것이야말로 소유욕이 넘쳐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필요하고 어려운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무소유'라는 화두는 매력적인 언설로 다가온다. 소유냐, 존재냐!
불현듯 집안 곳곳에 쌓여 있는 물건들이 부담스러워졌다. 옷과 신발과 책들, 크고 작은 박스에 모아놓은 신문 쪼가리들, 주방 서랍과 거실· 방 이곳저곳에 쑤셔박혀 있는 잡동사니들. 이렇게 버려야 할 게 많다니. 10년이 넘게 안 입는 옷과 구두가 부지기수였다. 고이 모셔놓은 코트들은 색이 바랬다. 버려도 버려도 끝이 없었다. 구멍이 나고 닳아서 버려야 할 옷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차마 버리지 못했다. 그것들은 나를 옥죄는 소유물이었다. 비로소 집안 곳곳 나와의 질긴 인연들이 툭툭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도 아쉽지가 않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효용가치가 영원하지 않은 건 물건만이 아니다. 내 몸의 기능도 나이를 먹을수록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 무서운 사실을 올 봄 뼈저리게 실감했다. 3월 중순에 발목을 접질려서 3개월 넘게 제대로 걷지를 못했다. 마음대로 걸을 수 없다는 사실. 그것은 내겐 형벌과도 같았다. 일하고 잠잘 때 빼고는 나는 늘 걷는다. 들로 산으로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다 갑자기 하이힐도 신을 수 없고, 산에도 갈 수 없고, 되도록 걸어서는 안된다는 의사의 진단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더 우울했던 건 이 놈의 발목이 치료를 받아도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는 거다. “워낙 허약체질인데다 젊은 나이도 아니어서…”라며 갸우뚱하는 의사의 표정이 날 미치도록 초조하게 만들었다. 눈 앞에서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보문산을 보면서, 놀이터에서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눈물만 흘릴 뿐 속수무책이었다. 긴(?) 고통의 터널을 빠져나와 이젠 걷는 게 어느정도 수월해졌다. 중요한 건 훗날 내 몸은 지금과 같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그땐 맘대로 걷고 먹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건강도 언제까지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소유욕은 집착을 낳는다. 사람에 대한 집착만큼 질기고 무서운 건 없다. 부모와 자식, 남과 여, 친구…. 우리는 사랑을 소유할 수 있을까. 사랑이란 실체는 사물이 아니기 때문에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다. 인간은 그 어리석은 환상에 사로잡혀 사랑하는 대상을 지배하려 한다. 아니 에르노의 소설 『집착』은 떠난 남자에 대한 여자의 뒤늦은 눈먼 욕망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집착으로 변하는 지를 보여준다. 남자의 새로운 여자를 찾아내기 위한 여자의 광기어린 행동들, 질투로 인한 고통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여자의 내밀한 행위들. 여자에게 유일하게 진실한 것은 단 하나- '나는 그를 다시 소유하고 싶었다'. 이런 사랑은 목을 조여서 마비시키고 질식시켜 죽이는 행위다. 순전한 소유욕에서 새디즘에 이르기까지의 왜곡된 사랑의 잔혹한 행위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진행되고 있다.
물질만능주의가 판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유에 대한 부르주아적 강박은 사랑뿐만 아니라 돈, 건강, 명예, 비싼 물건에 이르기까지 확장됐다. 법정스님은 극단의 무소유를 추구했다. 사소한 난초에 대한 지극한 사랑도 집착임을 깨닫고 미련없이 친구에게 주고 난 후 날아갈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소유를 범죄처럼 생각했다. 소유관념이 인간의 눈을 멀게 한다는 것이다. 버려야 얻는다고 했다. 그것이 욕망이든, 물질이든 버림으로써 마음의 자유를 얻는다는 건 얼마나 근사할까. 나는 여행가방 하나 정도면 족하다. 언제든지 자유롭게 훌훌 떠날 수 있으면 그만이다. 허나 소유욕을 부추기는 것들이 세상 천지에 널려 있어 마음을 어지럽힌다. 난 아직 버릴 게 많다.
우난순 기자 rain4181@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