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호진(산흥초 교사) |
“선생님, 드디어 슈퍼오디나무에 완전 커다란 왕오디가 열렸어요. 그거 따먹다가 왕오디에 붙은 개미랑 싸움을 했어요.”
봄꽃들이 지고 여름이 막 시작될 즈음, 학교 정원에는 앵두, 오디, 보리수, 살구 등 온갖 열매들이 가득히 열렸다. 아침마다 아이들은 잘 익은 열매들을 따먹으면서 한참을 어울려 놀다가 들어왔다. 오늘은 무엇을 따먹었는데 그 맛이 어땠는지, 어떤 나무의 열매가 맛이 있는지, 어디에 열매가 많이 열렸는지 숨막히는 자랑질로 교실이 시끄러웠다.
“보리수 10개를 따서 병아리에게 줬는데 산이가 와서 다 뺏어먹었어요. 산이는 욕심쟁이에요.”라며 울상을 짖는 아이도 있었다. 산이는 학교에서 키우는 닭의 이름이다. 달걀 2개를 부화시켜 키웠는데 그 놈 이름이 학교이름을 따서 ‘산’이와 ‘흥’이가 되었단다. 요즘 우리 반 아이들과 나누는 꿈같은 대화이다. 도심 속 학교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이야기들을 주고받는다.
교직생활 내내 대도시 중심지 학교에 있다가 올해 3월 한적한 소규모 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처음 방문을 했던 2월은 바람이 여전히 사납고 삭막하기 그지없는 한겨울이었다. 그래서인가 앙상한 나무들만 있는 정원과 페인트가 벗겨진 조각상만 덩그러니 있는 분수가 을씨년스럽고 쓸쓸하게만 느껴졌다. 그뿐이었다. 규모만 작았지 이전학교들과 뭐가 다를까 하였다.
하지만 개학을 맞고 아이들이 가득 찬 학교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정원에 새싹이 돋고, 꽃들이 피어나면서 학교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되었다. 학교 숲속에 가득 퍼진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꽃들이 만발한 정원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관찰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무거운 가방을 끌고 학원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저녁시간을 다 보내고도 성적과 친구관계 때문에 힘들어하던 그곳과 여기는 전혀 다른 세상임을 알게 해주었다.
조그마한 이 학교에는 없는 것이 없다. 풍성한 숲이 있고, 아이들의 찬란한 꿈이 있고, 음악이 있고, 행복이 있고 작지만 제대로 영근 앵두처럼 고운 마음들이 가득하다.
우리 반은 특수학생을 포함하여 14명이다. 소규모 학교치곤 제법 많은 인원이다. 하지만 유치원부터 함께 올라온 터라 서로의 성향과 개성을 인정하고 잘 이해하고 있다. 가끔 소소한 오해가 생기기도 하지만 함께 오케스트라 합주연습을 하고 학교 숲속에서 뛰어 놀고, 함께 심고 가꾼 소산물로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 먹다보면 어느새 다 잊고 다시 하하호호한다. 영어를 잘하지도 과학, 수학을 잘하지도 않지만 아이다운 자유로움과 저희들이 심고 가꾼 텃밭과 정원을 제 집처럼 여기고 사는 작은 생명들을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다. 그러니 풀꽃보다 소중한 친구를 가족같이 위하고 부족함을 서로 채워주려고 한다.
우리 반 뿐 아니라 전교생이 적다보니 형님들과 동생들 사이에도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으니 이미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들이다. 얼마 전에는 앵두축제 연습으로 야외 간이무대에서 땀흘리며 무용연습을 하는 동생들에게 6학년들이 텃밭에서 수확한 부추로 부침개를 부쳐서 나누어 주었다. 형님들이 주는 것을 제비처럼 받아먹는 모습과 살뜰히 챙겨서 골고루 먹여주는 모습이 얼마나 이쁘던지…. 저런 모습도 자연스럽게 배우겠지, 그러니 서로에게 눈 흘길 일이 생길 리 없지 않을까?
곱셈, 나눗셈을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가 안간다는 우리 반 녀석이 월요일이 기다려진단다. 공부는 어려워서 못하겠지만 재미있다는 그 녀석의 말에 학교가 아이들에게 어떤 곳이어야 할까, 즐겁게 공부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학교가 아이들에게 월요일이 기다려지는 학교, 성적에 관계없이 공부하는 것이 재미있는 학교,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 함께 나누고 함께 이해하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정호진(산흥초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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