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흥산성 남문 |
제3회 성흥산성(가림성-부여군 임천면 군사리)
남쪽으로 현재 68번지방도(영동-강경-장항)가 동에서 남으로, 29번국도(예산,청양-규암-장항 하구언)가 남북으로 각각 인근을 통과한다. 이들 도로로 임천 소재지를 거쳐 진입한다.
임천은 삼국시대 가림성 지역으로 이 성은 백제의 가림성으로 비정되며 전방에서 사비 수도를 방어하던 관문이다. 지금은 간척으로 인해 육지 깊숙이 들어왔지만 과거에는 기벌포(장항)로부터 진입하는 금강변에 위치한 상태였다. 따라서 수로를 이용하거나 상륙 후 육로로 진입하는 적들은 이 곳이나 인근을 통과해야 하는 군사적 요충지에 자리했었다.
▲ 성흥산성 우물 |
멀리서 바라보면 찐빵을 올려놓은 듯한 형태다. 성은 성흥산(140m) 정상부에 둘레 약 1.5km 정도를 에워싼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성벽 높이는 고루 3~4m 가량 된다. 동벽과 남벽은 복원을 통해 잘 드러나지만 서와 북벽은 성벽의 윤곽만 남은 정도다. 성안에는 관련 건물들이 들어섰음 직한 공터, 식수 공급원이었을 물이 끊긴 우물과 북편에 현재도 물이 나는 지점이 있다. 복원된 동문과 남문지와 봉화터라 소개되는 웅덩이가 있다. 후백제 시절 고려 장수 유금필이 이곳에 와 빈민을 구제했다는 내력의 유태사의 사당이 세워졌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28년 조에 ‘가림(加林)성을 쌓은 다음 위사좌평 백가(苩加)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는 기록이 있어 축조연대와 관련 인물이 확실히 드러난 백제성이라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불만을 품은 백가가 동성왕을 살해하고 동성왕의 아들 무령왕에 의해 백가가 죽임을 당해 강물에 버려지는 등 파란만장한 백제사의 일면이 담겨 있다. 비록 높지는 않을지라도 백제 멸망 후 당군이 공격하고자 했으나 점령지 못할 정도로 견고한 성이었다.
▲ 성흥산성 동벽 원형 |
땀을 흘리면서 암벽을 타고 남문으로 들어서면 환영하듯 우뚝 선 느티나무 한 그루가 넉넉한 품으로 나그네들을 맞이한다. 아무리 한여름일지라도 시원한 바람에 금세 땀은 사라지고 한기가 들 정도다. 닭발처럼 사방으로 벋은 뿌리에 몸을 기대고 누우면 푸른 나뭇가지와 하늘이 그득하다. 어디 신선이 부러우랴. 멀리 들판 너머 금강물이 반짝이고 눈앞의 푸른 들판(가을이면 황금빛 들판)과 저녁노을이 장관이다. 사람들은 이 나무를 사랑나무라 부른다. 서동과 선화공주가 사랑을 나눈 곳이라나. 믿거나 말거나지만 그대로 믿어 주는 것이 더 낭만적일 것 같다. 그런 까닭에 모 방송극의 촬영지가 된 적도 있었다.
▲ 대조사 미륵불 |
성벽 둘레길이 잘 다듬어져 어린이들을 동반하여 가족들과의 하루 등반코스로도 무난하다.
성으로부터 남쪽 기슭, 백제시대 것으로 전해지는 절 대조사(大鳥寺)도 함께 들러볼 만하다. 성에서 절까지는 시원한 숲길로 통한다. 한 노승의 꿈에 황금빛 큰 새가 나타나 그에 따라 절이 지어졌고 현장에도 그 새가 나타나 공사를 독려했다는 전설이 깃들었다. 마당에는 고려 때 것으로 추정되는 석탑과 관촉사 은진미륵과 형제쯤으로 보이는 미륵불상이 지긋이 아랫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당시의 불상 조성 추세가 그랬는지 모르지만 잘 생겼다기보다는 어딘가 투박하고 균형미가 부족한 듯한 느낌이다. 불상의 머리에는 소나무가 푸른 양산처럼 씌워졌다.
조영연 / ‘시간따라 길따라 다시 밟는 산성과 백제 뒷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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