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려 살수대첩 당시의 산성전 상상도 |
제2회 고대 산성전은 어떻게 전개됐을까
우리나라 고대 전투는 산성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그만큼 평지전에 관한 기록은 드물다. 고대 전쟁이 오늘날과는 달리 전선을 형성하면서 전면전으로 전개되기에는 수송수단의 미흡과 절대적으로 군사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사조직도 오늘날처럼 국가 전체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삼국시대에는 상시 유지되는 중앙군과 유사시 동원되는 지방군 형태로 조직됐던 듯하며 지방군은 대개 농민병들이었다. 이들 징집되는 농민병들은 오늘날 예비군처럼 일 년에 몇 차례 동원돼 훈련을 거치다가 유사시 동원되는 형태였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를 보면 고대 전투의 형태는 대개 ‘몇년 몇월 00군이 00성을 공격하므로 장군 아무개가 군사(精兵 혹은 步騎) 얼마를 거느리고 나아가 싸워 크게 파했다 혹은 패하여 달아났다’는 식으로 기록된다. 정병 혹은 보기로 나타나는 이들이 중앙에서 내려오는 주력군들로 여겨진다. 말을 타거나 갑옷, 무기 등을 제대로 갖춘 이들이 그들이었을 것이다.
▲ 고구려 안시성 전투 당시의 산성전 상상도 |
성을 공격하기 위해서 필요한 공성무기들로 대개 우리 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운제(雲梯), 쇠뇌, 포차(抛車 혹은 發石車) 정도이다. 우리 산성전에서 사용된 무기들이 단조로웠을 것임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안시성 전투나 육도삼략 등에는 전혀 생소한 무기들 이름이 등장하는 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것은 한반도의 지형적 특성 때문에 고도의 공성무기가 사용될 수 없었던 탓이었다. 다만 구당서 등의 ‘백제는 기사(騎射)를 중시했다’는 기사를 통해 말타기와 활의 활용이 대단히 활성화 됐음을 암시한다.
▲ 신라시대 무기 쇠뇌 |
특히 신라의 쇠뇌 기술은 당나라도 탐내던 첨단무기였다. 그 기술을 탐내어 당태종이 직접 신라의 쇠뇌 기술자 구진천을 불러와 온갖 협박과 공갈로 위협했다는 기사가 말해 준다.
고대 우리 군사들은 창, 칼, 활 등의 기본 무기 외에 농민군으로서 즉시 가동 가능한 농기구들, 예를 들면 낫, 괭이, 쇠스랑, 갈고리, 도끼, 뫼 등이 동원됐을 것이다. 돌이 중요 무기로 쓰였음은 장군봉산성이나 자지성(금산), 무주의 주계고성 등의 투석용 돌무더기 들의 경우에서도 입증된다. 경제적 여건상 생활복으로 출전한 지방병들은 중앙에서 파견되는 지도자들의 통제를 받았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성은 ‘여러 가지 시설들을 갖추고 그 안에 사람들을 담아 보호하는 그릇’에 비유된다. 따라서 우리의 산성들은 교통로를 중심으로 서로 인접해서 형성돼 공성이나 수성시 상호 협력이 용이하다.
그에 따라 전략면에서 지역의 주민들은 유사시에는 마을을 비우고 산성 안으로 들어간(淸野入保) 다음 인근의 성들과 협력하여 방어하는(협력방어) 전술을 구가하여 적을 막거나 공격했다.
▲ 무기-발석거 |
조영연 / ‘시간따라 길따라 다시 밟는 산성과 백제 뒷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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