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연휴가 끝나고 대전으로 돌아올 때 내 손엔 짐이 한보따리다. 엄마가 먹을거리를 바리바리 싸주기 때문이다. 떡, 각종 전과 반찬, 고기 그리고 과일까지. 일주일치 먹을 식량이다. 지난 설엔 고사리볶음과 더덕무침, 숙주나물을 넉넉히 가져와서 부지런히 먹어치우지 않으면 상해서 버릴 거 같아 고민스러웠다. 옳지, 비빔밥을 해먹자. 비빔밥이 뭐 별건가? 있는 반찬 넣어서 비비면 되는 거지. 냄비에 고사리, 숙주나물, 더덕무침에 신김치 썰어넣고 상추도 좀 뜯어넣은 다음 고추장 넣고 들기름을 살짝 뿌린다. 그리고 밥을 얹어 뚜껑을 닫아 중불에 지글지글 소리가 날 때쯤 계란 프라이를 넣어 다함께 비벼준다. 중요한 건 밥이 바닥에 살짝 눌어붙어야 한다는 것. 한숟갈 오지게 떠서 먹었는데 이렇게 맛있을 수가!
전주는 대전에서 기차로 1시간 반도 안 걸린다. 내 고향 청양가는 시간보다도 짧다. 매스컴에서 전주한옥마을에 대해 하도 떠들어쌓길래 얼마전부터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안달나던 차였다. 전주역에서 한옥마을 가는 시내버스를 타자마자 버스 기사에게 전주비빔밥 맛있게 하는 곳을 아느냐고 물었다. 진짜 숨은 맛집은 택시기사들이 안다지만 버스기사도 못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전주비빔밥 비슷비슷해요. 우리는 밖에 나가서 먹어요. 김제 쪽으로 가요. 거기서 소를 언제 잡는지 아니까요. 비빔밥에 들어가는 육회는 싱싱해야죠.”
알고보니 버스기사는 유성 경마장 옆에서 2년 남짓 식당을 했다. 돈만 까먹고 고향 전주에 내려와서 버스기사 한지 얼마 안됐다. “돈 잃고 사람 잃어보니까 사는 거 별거 아닙디다. 돈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나 이 일 한달에 열흘 하고 나머지는 놀러 다니고, 아등바등 안살아요.” 같은 전라도라도 전주는 사투리를 안 쓴다. 광주하고는 확연히 다르다. 전주는 거의 서울사람 말씨다. 광주는 전라도 사투리가 징하다. 터미널이든 식당이든 어딜가나 ‘좋아부러’, ‘해부러’가 쉴새없이 들린다. 하긴 충청도도 충남과 충북 말씨가 사뭇 다르긴 하다.
평일인데도 한옥마을은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고즈넉한 분위기를 상상했는데 도떼기시장을 방불케했다. 왁자한 사람들과 꼬치고이 굽는 냄새와 연기가 진동했다. 주말에는 발 디딜 틈이 없다고 한다. 한복입은 청춘남녀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 지 쉴새없이 셀카 찍으며 깔깔댔다. 사람많은 곳에 섞이는 걸 질색하는 성격인데다 덥기까지 해 혀를 빼물고 헐떡거리며 간신히 한바퀴 돌아봤다. 다행히 얼마전 친구가 사준 양산이 있었기에 망정이지(이래봬도 메이커다) 안그랬으면 단 1분도 견디지 못했을 거다.
하나 건진 건 있다. 바게트 버거. 맛이 아주 그냥 죽여줬다. 베어먹을 때마다 바사삭 하는 바게트 부서지는 소리와 쫑쫑 썬 청양고추가 들어간 내용물이 환상궁합이었다. 이것 때문에 다시 오고 싶어질 것 같았다. 날씨 따스한 봄날에 ‘알 비 백’.
허나 전주의 명물 전주비빔밥을 먹어야 트림 한번 제대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전주비빔밥을 처음 먹어보는 건 아니다. 오래 전, 한여름에 휴가를 받아 지리산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전주에 들렀었다. 마침 초등학교 동창이 전주에 살고 있었다. 시간나면 전주에 놀러 와라, 맛있는 비빔밥 사주겠다…. 뻔질나게 전화질 해대길래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심사로 연락했다. 다짜고짜 데려간 곳은 한국관이란 곳이었다. 전주 시청 앞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밥풀 하나 안 남기고 싹 비웠다. 고명으로 올린 육회가 어찌나 부드러운지 살살 녹았다. 그런데 그 친구가 자고 가라며 숙소는 자기가 잡아주겠다고 나를 잡아 끌었다. 얼씨구, 요놈 봐라. 하여간 남자들은 여자랑 잘 궁리만 한다. 걘 지금도 여전히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고 허세떨면서 전주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서 떠들썩한 한옥마을을 벗어나 한적한 곳에 자리잡은 식당에 들어갔다. ‘전주비빔밥 무형문화재의 집’으로 지정된 곳이었다. 30년이 넘었단다. 노포라고는 할 수 없어도 어느정도의 솜씨를 인정받은 셈이다. 전주비빔밥은 시각적으로 화려하기 그지 없다. 10가지가 넘는 채소들이 오밀조밀하게 들어앉은 모양새가 눈으로 먹기에도 충분히 맛있다. 제사나 잔치를 치른 뒤 남은 반찬을 소비하는 차원에서 생겨난 비빔밥이 이렇게 고급스럽게 진화했다. 그런데 아뿔싸, 계란 노른자가 없다. 조류인플루엔자 때문에 당분간 계란노른자를 넣을 수 없다고 했다. 이거야말로 화룡점정의 미완성 아닌가.
역시 계란노른자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있었다. 감칠맛이 덜했다.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내 옆자리의 청년 넷은 콜라를 두병이나 시켜먹는 폼이 노른자 없어서 뿔따구 난 모양이다. 어쩌겠나. 그저 살처분 당한 닭들을 위해 명복을 빌어줄 수밖에. 집에 가서 사곰사곰한 열무김치에 고추장 푹 떠서 비벼먹어야겠다. 비빔밥은 비벼야 맛이다. 써억써억.
우난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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