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애의 미술읽기]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던, 외로운 왕의 유일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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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애의 미술읽기]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던, 외로운 왕의 유일한 선택

8. 독실한 신앙과 예술의 만남, 펠레페 2세와 보스

  • 승인 2017-06-16 14:40
  • 정경애 보다아트센터 관장정경애 보다아트센터 관장
격동의 시기 16세기 유럽의 주인공은 스페인이었다. 해가 지지 않는 전성기 스페인을 이끌었던 왕은 펠리페 2세였다. 그는 아버지 카를 5세로부터 물려받은 막강한 권력과 영토, 신대륙 식민지로부터 거둬들이는 어마어마한 부(富)로 거칠 것 없는 거대한 제국의 지배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펠리페 2세도 남모를 어려움이 있었으니, 첫째는 외로움이었다.

그는‘아무도 믿지 말라’는 선친 카를 5세의 충고에 너무 충실했다. 그 결과 사람들을 멀리하여 주변에 믿을만한 신하가 제대로 없었다. 그가 믿는 것은 오로지 각계에서 올라온 방대한 서류뿐이었다. 거기다 후계자였던 아들과 가장 사랑했던 아내의 죽음은 그를 더욱 고립시켰다.

둘째는 경제적 어려움이었다.

남 보기에는 돈 걱정과는 거리가 아주 먼 최고의 금수저 출신이었지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 중에는 엄청난 빚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그는 파산 선고를 한 최초의 왕이 되었고, 그 후로도 파산선고는 3차례나 이어졌다. 파산의 가장 큰 이유는 카톨릭 유럽을 지키려는 맹목적인 신앙에서 비롯된 끊임없는 종교전쟁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방대한 양의 미술품 구입에 아낌없이 돈을 썼다는 사실은 의외의 일이 아닐 수 없다. 스페인 왕위에 오른 후 이베리아 반도 밖으로 단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던 그는 마드리드 북쪽의 산기슭에 지은 엘 에스코리알 궁전(El Escorial)에 칩거했다. 거기서 자신의 드넓은 속령지로부터 올라온 서류에 열중했다. 시대의 변화에 쫒는 행위는 죄악이라 여겼기에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택한 유일한 방법은 서류를 잘 검토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오직 보고되는 ‘서류’를 통해 세계를 조망하고 통치함으로써 실질적인 현안들에서 점차 멀어져 갔던 그에게 어쩌면 ‘미술품’이야말로 실체적으로 그가 직접 마주 보고 경험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대상 중 하나였다.

오로지 집무실에 칩거하면서 미술 후원자의 이미지와는 좀 다른 외골수에 고집불통인 펠리페 2세가 이토록 미술품 구입에 매달린 이유가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한 부분이다.

왕족답게 미적 안목과 고상함을 지녔음은 물론일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모든 행정을 서류에만 의지한 그로써는 미술품이야말로 실제 세상과 동떨어져 사는 자신의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이었다. 수많은 종교적 작품들과 성물들(예수의 수염, 예수에게 씌어졌던 가시 면류관의 가시, 그리고 동정녀 마리아가 흘린 피 같은 눈물의 흔적이 남은 손수건의 일부 등 6천 점)은 그의 열정과 돈의 결정체로 엘 에스코리알(El Escorial) 궁전을 장식했다. 거기에 유명한 이탈리아 화가들을 초빙하여 벽면을 그림들로 가득 채웠다. 이 중에서도 가장 애착을 보인 컬렉션은 보스의 작품들이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경 ~ 1516년)는 플랑드르 출신이다. 플랑드르는 오늘날의 벨기에와 네덜란드 남부를 아우르는 지역으로 상공업의 발달로 경제적 번영과 더불어 무역의 중심지였다.

이 지역은 15세기부터 번영과 안정 속에 황금시대를 맞이하여 반 아이크로 비롯되는 예술적 전통이 일찍부터 형성되었다. 두터운 신앙심의 토대 위에 극사실적인 묘사와 유화라는 새로운 물감의 발명은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부친 카를 5세의 영향을 받은 펠리페 2세도 플랑드르미술을 선호했는데 그 이유는 종교였다.

보스는 인간의 타락과 지옥의 장면을 소름끼치도록 잘 그려 <지옥의 화가> 또는 <악마의 화가>로 불린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방탕하고 잔인한 악마와 괴물 등은 기괴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것이다. 특히 에로티시즘과 결합되어 오해의 소지도 많지만 나타고자 하는 내용은 충실한 교회의 메시지이다. 그리스도교적 가치의 상실로 인해 야기된 세상의 혼란과 타락한 인간에 대한 꾸짖음과 비난은 교회의 가르침과 정확히 일치한다. ‘행복은 마치 유리와 같아서 쉽게 깨지고 만다’는 자신의 그림의 문구처럼 매우 교훈적이고 종교적이다.

펠리페 2세의 삶은 여러모로 처절했다. 젊었을 적부터 온갖 압박과 의혹 등에 시달렸고 늘 우울했던 그는 그때마다 종교에 더욱 매달렸다. 보스의 그림은 유일한 위로자이자 도피처였다. 특히 <쾌락의 동산>은 첫 눈에 반한 3면 제단화로, 지금은 프라도미술관 소장품이지만 그는 이 작품을 손에 넣기 위해 원소유자인 알바공작이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

▲ 히에로니무스 보스 <바보들의 배> 1500년, Oil on wood, 58x33 cm, 루브르미술관
▲ 히에로니무스 보스 <바보들의 배> 1500년, Oil on wood, 58x33 cm, 루브르미술관


보스의 그림 중에 <바보들의 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바보들의 배'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태운 배를 뜻한다. 문학이나 회화에 자주 회자되는 걸 보면 예나 지금이나 '바보들'이란 세상에 차고도 넘칠 만큼 존재함이 분명한 거 같다.

크지 않은 배 안에는 사람들로 빽빽하다. 복장을 보니 무엇이든 절제하고 금욕해야 할 수도사와 수녀도 포함되어 있다. 그 주위에는 배에 올라타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맴도는 인간들도 있다. 위태위태한 것이 꼭 가라앉을 것 같다. 그런데도 배에 타고 있는 온통 탐욕에 물든 사람들은 먹고 마시며 아우성이다. 돛대도 사공도 없는 배는 그저 오늘의 쾌락만을 위해 정처 없이 흘러갈 뿐이다. 멀리 펼쳐지는 황금빛 풍경은 그지없이 아름답지만, 사람들은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자기 욕심만 채우려한다. 삶을 가치 있게 사용하지 못하고 쓸데없는 데에 낭비하는 방탕한 인간은 결국 가라앉고 말 것이다. 이 날카로운 풍자는 보스가 우리들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교훈으로, <바보 배>에 탄 바보들은 바로 우리 자신임을 깨닫게 해준다.

정경애 보다아트센터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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