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붕산 공원 뒷문 곁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물. 1938년 임시정부는 이곳에서 유주시민들의 협조하에 항일운동을 펴다가 중경으로 옮겼다./사진=김인환 |
[중국 소수민족 취재탐방기] 3. 말(馬)싸움이 유명한 소수민족 먀오족(苗族)
이튿날 나는 유주시(柳州市)를 향해 출발했다. 새로 생긴 고속도로를 달려 4시간 만에 고속버스는 유주시(柳州市)에 도착했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유주빈관에 여장을 풀고 나는 곧장 시 정부를 찾았다.
문화국의 왕 국장. 내가 만나야할 사람이다. 왕 국장은 나를 만나자마자 반갑게 악수를 청해온다. 그렇잖아도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노라며 반긴다.
한국에서 온 김선생님을 환영합니다, 중국의 소수민족을 취재하시겠다구요. 마침 내가 이틀 후에 소수민족 먀오족 자치 현 정부에 출장을 가게 되어 있으니까 저랑 같이 가시지요. 때마침 잘 되었습니다라며, 마치 내 취재 일정까지 신경을 써 주려는 눈치다.
그날 저녁은 유주빈관 3층에 있는 그릴에서 오후 6시 30분에 약속을 했다. 약속시간에 나타난 왕 국장의 일행은 8명이었다. 나는 이미 남영시에서 경험한 바가 있어서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여유만만하게 일행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왕 국장은 헤어지기 전에 귓속말로 내일 오전 10시까지 자기 사무실로 와 달라고 한다. 다음 날 나는 시간에 맞춰 그의 사무실을 찾었다.
그의 사무실엔 이미 낯선 사나이 한 명이 와 있었다. 왕 국장이 소개를 한다. 팽 선생이라고 밝힌 그를 가리켜 왕 국장은 좋은 친구가 될 거 라며 의미 있는 웃음을 흘린다.
오늘은 하루 종일 시간이 있으므로 팽 선생이 친구가 되어 안내를 해 줄 것이니 즐겁게 보내란다. 팽 선생과 함께 시내로 나왔다.
서울의 명동 쯤 되는 유주시 중심가였지만 재래식 시장 풍경이 대부분이었다. 발맛사지 집 간판이 곳곳에 많이 보였고 노래방들도 자주 눈에 띄었다. 강변까지는 약 10분 거리였는데 유람선들도 볼 수 있었고, 강변엔 수석전문집들이 모여 있어 볼거리가 풍성했다.
길을 거닐며 팽 선생에게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묻자 자기는 문화사업만 하는 ‘문화인’이라고 한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온다. 웃겨도 한참 웃기는 팽 선생은 뒤에 알고 보니 자못 유식한 건달 중의 건달이었다.
거리를 지나다가 내가 놀랜 것은 대한민국임시정부관이란 팻말을 보면서 부터였다. 말로만 듣던 마지막 임시정부가 유주에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낡고 우중충한 2층 건물이었다. 입구엔 매표소가 보였다.
물어보니 2위안이란다. 2위안을 주고 안으로 들어섰다. 대한민국의 마지막 임시정부는 중경으로 알고 있지만 그 전에 비록 불과 몇 달밖에 안 있었지만 1층부터 2층까지 모두 임시정부의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유품들이 전시돼 있어 마음이 찡할 정도였다.
관람객이라곤 들어올 때부터 돌아 나올 때까지 나 혼자뿐이었다. 다 돌아보고 나오려다가 입구에서 멈추어 섰다.
매표소를 지키는 사나이에게 이곳 책임자를 만나볼 수 있느냐고 물으니 바로 자기가 관장이라고 한다.
하루 평균 관광객이 고작 10여 명 정도이고, 한국에서 단체관광객들이 유주시를 찾아와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안내하는 가이드조차 모르고 있으니 먹고 마시고 즐기는 쪽만 돌아보고 가 버린다는 안타까운 얘기였다. 지나가던 중국인들이 우연히 지나가다가 입장료가 너무 싸다보니 호기심으로 들어와 보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관장이 직접 표도 팔고 구내 청소도 하며 관리를 맡고 있다니 고맙기만 했다.
관장은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자 깜짝 놀라며 반가워한다. 알고 보니 그는 유주시 정부의 정규직 공무원이었다.
그렇다면 유주시 정부는 한국 정부와 아무런 관계도 없이 60여 년 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보존하고 또 관리해 왔다는 사실이다. 한국정부로 부터는 아무런 관심도,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있는 채 유주시 정부는 변함없이 이웃 국가인 대한민국의 임시정부를 보존하고 지켜 왔다는 사실을 한국 정부는 이제부터라도 이곳에 대한 (비록 늦었지만) 특별한 대책이 절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원숭이 동물원에서의 에피소드
내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자 팽 선생은 활달한 모습으로 나를 재밌는 곳으로 안내 하겠다며 택시를 잡는다. 우리들이 도착한 곳은 원숭이 동물원이었다. 1인 당 입장료 100 위안은 싼 가격이 아니다. 택시비며 입장료까지 모든 비용은 내가 지불해야 했고 팽 선생은 아예 나 몰라라이다. 동물원에는 작은 원숭이들이 끼익 끽끽 저마다 괴상야릇한 소리를 지르며 수 천 마리가 떼를 지어 몰려다니고 있었다. 그 중에 일부는 사람들 주변을 맴돌며 먹을 것들을 달라는 눈치들이다. 혹여나 어린 아이들이 음식물을 들고 있으면 잽싸게 달려와 나꿔채가는 바람에 울음을 터뜨리게 했다.
큰 원숭이들은 거목 위를 건너다니며 무언가 뛰어다니는 작은 원숭이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눈치였다. 드디어 이들의 대 전쟁이 벌어졌다. 다리가 아파 잠시 숲 속 벤치에 앉아 쉬고 있을 때였다. 팽 선생이 벌떡 일어나 오른 쪽 숲 속을 가리켰다. 한 쪽에 약 1천여 마리씩 두 편으로 갈라선 것이 눈에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 쪽 저 쪽 큰 나무 위에서는 덩치가 유난히 커다란 원숭이가 있고 그 주변에는 비슷한 크기의 원숭이들이 둘러싸여 괴상한 소리들을 내지르고 있다. 아마 모르긴해도 대장 원숭이와 그 참모들인 듯 싶었다.
팽 선생은 먼저 흥분해 소리를 지른다. 원숭이들이 전쟁 치를 준비를 하고 있다며 말로만 듣던 원숭이들의 전쟁이 이제 마악 시작될 것이라고 지레 소리소리 지르며 큰 소리로 떠들고 있다. 옆 사람들이 쳐다볼 정도다. 나 역시 옛날 일본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기억나 흥미로웠다. 드디어 한 쪽 대장의 명령이 떨어진 모양이다 요란한 소리를 지르며 상대편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 무렵이었다. 십여 명의 청년들이 뛰어오더니 그 중에 한 명이 원숭이들이 몰려있는 쪽을 향해 빵 빵 빵 하고 공포탄을 쏘아댔다. 그러자마자 그 많던 원숭이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정말 거짓말 같은 사실이었다.
나중에 나오면서 관리인에게 왜 총을 쏘고 그랬느냐고 물어보자, 껄껄 웃으며 원숭이들은 패싸움을 너무 좋아해 잠시라도 눈을 돌리면 금방 패싸움이 벌어지고, 그러다보면 많은 희생자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뒷 감당이 힘들어 진다며 머리를 절레절레 내 젓는다.
팽 선생은 좋은 구경 보게 되었는데 겁쟁이 관리인들 때문에 다 틀렸다면서 내내 투덜거렸다.
▲ 사진 중앙이 왕 국장이고 왼편이 필자/사진=김인환 |
유자농장의 기발한 상술
원숭이 동물원을 나와 다시 택시를 타고 유자농장으로 갔다. 입장료는 60위안이었다. 입구에는 커다란 현수막으로 (농장 안에서는 마음대로 실컷 먹고 갈 것)이라는 의미의 문구를 걸어 놓았다. 안에 들어가니 녹색 벌판에 먼저 가슴이 탁 트인다. 꼭 우리나라의 사과 농장 같은 분위기였는데 과일은 사과가 아니라 유자였다. 큰 유자는 어린아이 머리통 만 한 것도 있었다. 팽 선생이 먼저 한 개를 땄다. 절반을 쪼개어 맛을 보니 참 맛이 좋다. 팽 선생 역시 굿 굿 하며 기분 좋은 소리를 낸다. 그런데 아무리 먹성 좋은 사람이라도 반 개 이상은 어림도 없을 터, 농장주의 상술이 돗보인다 하겠다.
여기에 입장객들 역시 한 술 더 뜬다. 유자를 통째로 들고나가는 것이 불법이지 상품가치 없이 쪼개어진 채 갖고 가는 것은 괜찮다며 유자 몇 개를 모두 토막을 내어 배낭이며 가방에 꾸역꾸역 집어넣고 있었다.
농장에서 잠시 쉬다가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놀란 것은 들어갈 때는 보지 못한 리어커 장사꾼들이었다. 리어커마다 가득 가득 유자를 싣고 있었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유자 제일 큰 것 하나가 30 위안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고 보니 많은 입장객들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그 많은 유자들을 따서 반을 쪼개어 가방에 넣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유자를 통째로 갖고 나오지는 못하고 상품 가치만 없도록 해서 들고 나온 후 집안의 가족들과 나누어 먹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사서 먹으면 한 개에 30위안 하지만 60위안을 주고 입장한 후에 가족들이 실컷 먹을 수 있게 준비하고, 농장구경이며 분위기를 맘껏 즐기겠다는 유주시민들의 심사를 잘 이해 할 것 같았다. 팽 선생은 원숭이 동물원도 그렇고, 유자농장도 그렇듯이 본인은 콧노래만 부르면서 나를 안내하는 것 자체를 즐기려는 듯 보였다.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냥 ‘문화인’이라고만 대답했는데 이해 할 수 없는 애매한 대답이었다. 무슨 문화인인지 알송달송 하기만 하다. 그렇다고 무슨 문화인이냐고 물어보기도 묘한 일이 아닌가. 자칭 문화인이란 팽 선생과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먀오족(苗族)현 정부에 열열한 환영
이튿 날 오전 10시, 정확하게 왕 국장이 유주빈관 앞에 도착했다. 검은색 승용차 한 대를 타고 온 정장차림으로 으젓한 모습이었다.
그와 함께 자가용 승용차를 타고 가려니 내가 무슨 귀빈이나 된 듯싶어 신이 났다. 차가 한 시간 쯤 달린 후 에는 비포장 길로 접어들었다. 먼지가 뽀얗게 차 안으로 날려 들어온다. 그제서야 차 안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이미 폐차시기가 지난 듯 싶은 낡은 승용차 였다. 덜커덩거리며 세 시간을 더 달린 후 에야 먀오족 현 정부 청사에 도착했다.
정부청사 앞에는 약 30여 명이 두 줄로 서서 왕 국장과 나를 영접하고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들 가운데 주요 인물들이란 현(縣) 정부 공산당 서기, 부서기 들과 현 정부 현장과 부 현장들 각 국에 국장들과 부 국장급들이었다. 시정부의 국장이 온다는 바람에 이들은 2시간 전부터 이렇게 나와서 두 줄로 기립한 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왕 국장은 차례대로 이들과 악수를 하며 옆에 따라가는 나를 소개했다.
현 정부는 여러 채의 부속건물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 하나는 여관 건물이었다. 이미 내 방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약 두 시간가량 나를 숙소에 기다리게 해놓고 왕 국장은 회의실로 들어갔다. 출장을 왔으니까 먼저 회의에 참석하는 모양이었다. 회의를 마쳤는지 우루루 몰려 나왔다. 그리고 옆에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나 또한 안내를 받아 홀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까 입구에 도열해 서 있던 일행 모두가 참여 한 것 같았다. 이미 홀 안에는 먹고 마실 준비가 다 갖추어져 있었다. 그런데 또 하나 특이한 것은 먀오족 전통복장을 한 꾸냥(아가씨)들이 남자 한 명마다 한 명씩 짝을 짓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내 옆에도 똑 같이 어여쁜 꾸냥 한 명이 앉았는데 잘 해 보아야 20살이 되었을까 말까한 앳된 소녀였다.
그런데도 이미 어디서 숙련을 쌓았는지 애교를 부리며 깔깔거리는 폼이 예사 행동이 아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술잔이 오 간다 내 곁에 앉았던 왕 국장은 내게 큰 소리로 “오늘은 맘껏 즐기십시오. 그리고 오늘 저녁은 푹 쉬고 내일 먀오족 촌으로 떠날 것 이니 걱정 말고 마십시다” 라며 술잔을 권한다.
<다음 주에 계속>
김인환 시인
김인환 시인은 시집<님의 마음에:1968년> (비가 내리는 :1970년) (다시 한밤에 돌아와:1973년) (시음집:1978년:한국 최초의 음반시집) (바람의 노래:1992년)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98년) (낙엽이 되어보지 못한 그대는;2013년) 등의 시집과 방송칼럼집 (내일을 향하여), 시론집으로 (마두금을 어디서 찾나) 등이 있다. 1972년 부산 최초의 시 전문지를 발간한 바 있으며 MBC, KBS, 한국경제 등에서 30여 년 간 언론인으로 활약했다. 부산 크리스천 문인협회 회장, 중국 광동성 한인문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 문인협회, 현대시인협회,국제 펜클럽,대전 펜클럽 회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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