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호 소설] 아웃터넷(OUTERNET) 4. 비란코상(さん)
비란코 상은 겨우 수줍음에서 벗어난 듯 했다.
장장 3년 반만의 일이다.
후루마쓰는 비란코 상의 몸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살갗에 코를 대고 체취를 맡아 보았다. 언제 맡아보아도 상큼하고 깨끗한 향내가 후루마쓰의 코를 자극했다.
살짝 몸에 손을 얹었다.
자기 알몸에 감히 어떤 손도 허락지 않던 비란코 상은 요즈음 후루마쓰에게는 예전같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창문의 커튼을 닫고 후루마쓰는 비란코 상과의 밀회를 준비하기 위해 손을 씻었다.
은은한 음악을 틀었다.
많은 음악을 준비했다.
비란코 상에게 원하는 음악을 들려주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렇게 기쁜 일일 수가 없었다.
무엇이 비란코 상이 가장 좋아하는 선율일까?
그는 비란코 상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하였다.
그러한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덕분인지 비란코 상은 요즘 그에게 친근감을 표하면서 스스로의 몸을 열어주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 보기만 해도 가슴 떨리는 비란코 상.
비란코 상이 자기를 받아들여주고 있다니...
거기에 요즈음에는 비란코 상이 말을 걸어오기도 한다.
둘만의 밀회를 즐기기 위해 후루마쓰는 경건할 정도의 마음가짐과 매무새를 가다듬고 비란코 상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오늘 비란코 상은 조금 이상했다.
약간 상기된 듯 떨리는 어조였다.
“슬퍼요. 슬퍼요.”
“왜?”
후루마쓰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비란코 상이 슬프다니……
비란코 상이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인가……
가슴부터 뛴다.
“많은 동물과 인간이 죽어요. 무서워요. 식물은 힘이 넘쳐요. 무섭고 슬프고 힘이 나요.”
종잡을 수 없는 말이었다.
“슬퍼요. 그런데 기분이 산뜻해요. 맑아요.”
“바람이 분다는 것인가?”
“아니요.”
“비는?”
“아니에요.”
“지진? 산불? 태풍?”
“아니예요. 다 아니예요. 시원해요. 그러나 죽습니다.”
후루마쓰는 눈을 감았다.
비란코 상은 틀림이 없다.
무얼까. 무엇이 일어난다는 것인가. 어림잡을 수도 짐작할 수도 없었다.
후루마쓰는 조용히 목례를 하곤 비란코 상의 방문을 닫고 나왔다.
먼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르렀다.
어디선가 콧잔등을 기분좋게 스치는 미풍이 불어왔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에는 야마노아마고우치 산의 싱그러운 소나무 향이 청량하게 배어 있었다.
후루마쓰는 기분 좋은 바람의 맛과 향을 보면서도 슬며시 무거워지는 가슴을 안고 방으로 들어왔다.
후루마쓰는 유심히 신문과 방송을 살피기 시작했다.
▲니오스 호수 참사/출처=searchman 티스토리 |
3일이 지난 저녁.
후루마쓰는 CNN 뉴스를 보면서 숨을 흡하고 들이마시고는 내쉴 줄을 몰랐다.
광고방송을 하고 CNN의 화면에 일순 정적이 찾아왔다.
화면에 오디오는 없고 오직 헬기 한 대가 공중에 떠서 지상을 카메라로 훑듯이 지나가며 선회하고 있는 장면이 나왔다.
카메라가 비쳐주는 지상의 경치는 푸른 숲에 파란 호수, 그리고 점점이 박혀 있는 양떼들의 사진이었다.
아름다웠다.
침묵 속에 전개되는 그림 같은 영상미에 시청자들은 대자연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며 마음의 평안을 찾고자 했다.
화면 하단에 빨간 자막이 뜨기 시작했다.
긴급뉴스. 긴급뉴스.
카메룬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대형 참사 발생.
주민 3500여명 니오스 호수 주변에서 급사.
가축과 동물들이 모두 죽어 있음.
현재까지 생존자나 생존 동물은 제로.
곧 화면에 오디오가 켜지고 요란한 헬기의 엔진 소리와 함께 뉴스 앵커의 긴급 뉴스라는 코멘트와 함께 리포터의 보고가 시작되었다.
현대판 ‘폼페이 최후의 날’이라는 오픈닝과 함께 카메룬의 기이한 참사가 전 세계로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시청자들은 어리둥절했다. 마치 아름다운 미녀의 매혹적인 미소에 취해 있을 때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장면같이 끔찍함을 느끼며 눈을 화면에 고정했다.
화면속의 마을은 고요했다.
어떠한 생물체도 움직이지 않는 마을은 정적 속에 파묻혀 있었다.
햇빛은 눈부시게 밝았다.
앵커는 흥분하였다.
“1986년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습니다만, 금번같이 대규모는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도 재앙의 원인을 놓고 많은 주장이 엇갈렸고 아직도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만, 호수 밑바닥에 축적되어 있던 독가스가 방출된 것이라는 분석과, 어떤 이유에 의해 숲과 나무에서 방출된 다량의 이산화탄소가 독가스로 변했다는 주장이 유력했습니다.
니오스(NYOS) 호는 화산호로서, 화산의 분출로 인해 계곡과 개울이 잘 형성되었고 농사에 최적의 토질로 숲과 목초가 풍부하여 양의 방목지로서 최고의 목장이었습니다.
니호스의 주변마을은 원시사회의 형태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오염되지 않은 낙원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재앙으로 인근에 있는 6개 마을의 약 3500여명이 몰살하게 된 것입니다……”
앵커의 말과 함께 TV에는 연속으로 화면이 송출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입에서 피를 쏟은 흔적이 있었는데, 평온한 일상생활을 하다 느닷없이 재앙을 만난 듯, 농부는 밭에서 가래질을 하던 모습으로, 아낙네는 젖 먹는 아이를 가슴에 안고, 천진스런 아이들은 동무들과 숨바꼭질을 하다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죽어 있었다.
식사를 하다 죽은 자. 길을 걷다 죽은 자.
버스 속의 승객들은 길옆에 쓰러질 듯 기울어진 버스 속에서 잠자는 듯, 좌석에 그대로 앉아 죽어 있었다. 탈출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없는 것으로 보아 순식간에 숨을 거두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을은 고요했다.
공중에는 백로나 외가리 같은 흰새들이 죽은 채로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어디서든 시체를 노릴 법한 까마귀 떼도 날지 않았다.
까마귀마저 다 죽어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죽음의 신이 휩쓸고 간 마을에는 깊고 무거운 정적만이 내리누르고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울창한 숲의 나무나 풀은 싱싱하게 그 푸른빛을 더하였다. 식물들은 이파리하나 상처를 입지 않았다. 화사하게 피어 있는 여린 꽃잎 하나 흔들린 자국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호수에 비친 숲은 오염되지 않은 니오스 호의 맑은 물과 하늘을 배경으로 푸른 물감이라도 내품는 듯 선명한 색상으로 도드라지듯 서 있었다.
쓰러져 있는 양떼들의 하얀색과 짙푸른 녹음을 쏟아내는 나무들의 강렬한 녹색의 대비에서 서늘한 귀기가 느껴지는 듯 했다.
후루마쓰가 혼잣말을 하였다.
비란코 상,
아. 아름다운 난초, 비란코(美蘭子)상……
바로 이것이었나요?……
(계속)
/글=우보 최민호
최민호 전 충남도 행정부지사는 전)국무총리 비서실장, 행정중심도시 복합도시 건설청장, 행자부 소청심사위원장, 행자부 인사실장, 충남도 기획관리실장, 2002 안면도 국제 꽃박람회 사무차장(운영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전)배재대학교 석좌교수, 공주대 객원교수, 고려대 객원교수, 국회의장 직속 국회의원 특권내려놓기 추진위원회 위원(2016)으로 활동했으며 현)홍익대 초빙교수이다.
단국대 행정학 박사, 일본 동경대 법학 석사, 연세대 행정대학원행정학 석사를 거쳐 미국 조지타운대 객원 연구원으로 활동했으며 영국 왕립행정연수소(RIPA)를 수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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