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미선 편집부장 |
‘살아온 날의 미필적 고의(未必的 故意)는 언제나 그림자 남아 있고, 결코 아름답지 못한 삶의 방편이라 변명하기엔, 남아 있는 가슴 한곳 양심만은 속일 수 없음이 사람이고 싶음이 아니겠는가 <삶, 미필적 고의-장현수 詩>'
생후 8개월 된 아이가 울자 달래기 위해 안아서 머리위로 들어 올리는 행위를 십 여차례 진행하다가 아이를 놓쳐 숨지게 한 친부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그래서, 법은 어떤 판결을 내렸을까?
그저 아이를 달래는 과정에서 벌어진 과실이라 주장한다면 ‘고의’를 밝혀낼 길이 없기에 ‘무죄’일 것이다. 하지만 전후사정을 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험을 전혀 예견하지 못했을지 아버지의 머릿속이 궁금하다.
결론적으로 재판부는 “위험하니 비행기 놀이를 하지 말라”는 친모의 당부가 있었던 점과, 과도한 행위가 아이를 다치게 할 수 있다고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다는 점을 들어 아동학대치사죄를 인정해 징역형을 선고했다.
팥쥐 아빠도 아니고 뭐 이래…. 비슷한 사건이 이슈화 될 때마다 살인이냐 상해치사냐, 인식있는 과실이냐, 미필적 고의냐 논쟁이 뜨겁다.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이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잘못 활용하고 있는것이 바로 ‘미필적 고의’란 단어다.
“나의 말과 행동이 너에게 그런 결과를 가져올 줄 몰랐어. 그러려던게 아닌데 미안하게 됐어 미필적 고의야”란 말은 잘못된 표현이다. ‘미필적 고의’란 안 좋은 결과가 발생할 것을 알면서도 행한 범죄나 행위를 뜻한다.
상대방에게 해를 끼치려던 것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면 그저 고의성 없는 ‘인식있는 과실’정도가 되겠다.
결국 미필적 고의도 ‘고의’의 죄지만 행위자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소용없다. 지금까지 대형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검찰은 미필적 고의를 적용해 ‘살인죄’로 처벌하려 했지만 법원은 업무상 과실치사죄로 밖에 적용하지 못한 이유가 그 때문이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피고인들과 가습기 살균제 파문을 일으킨 ‘옥시’전 대표에 대한 법의 판단이 대표적 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행위는 규제될 수 없다. 하지만 그 이익추구가 다른 사람의 불행을 가져온다면, 특히나 그것이 대기업과 공공기관의 행위라면 공권력으로 규제하고 처벌해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도 많다.
하지만 그런 법원이 살인의 미필적 고의를 폭 넓게 인정한 판례도 있다. 2014년 침몰하는 배 안에서 승객 300여명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먼저 탈출한 세월호 선장 이준석씨의 경우가 그러하다.
대법원은 승객이 모두 익사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예견하고도 선장이 먼저 탈출했다며 살인의 미필적 고의를 인정, 무기징역을 확정했다. 이 사건은 대법원이 대형 인명사고에서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를 인정한 첫 판례라는 점에서 국민들의 법 감정을 충분히 충족시키는 판결이었다.
반면 15년이나 흘렀지만 아직도 상처로 남은 사건도 있다.
▲ 13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KT 앞에서 열리는 효순·미선 15주기 행사에 설치된 고 심미선(왼쪽), 신효선 영정 사진 사이로 성조기가 펄럭이고 있다. /연합뉴스 |
2002년 6월 13일 경기도 한 지방도에서 14살 소녀 효순이와 미선이가 미군 장갑차에 깔려 현장에서 끔직하게 숨졌다. 가해병사들은 ‘과실치사’혐의로 미 군사법원에 기소됐고, 결국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죽음으로 잊혀져 버렸다.
사고가 난 도로는 인도가 따로 없는 편도 1차선의 좁은 도로로 사고차량의 너비가 도로 폭보다 넓은데다 마주오던 차량과 무리하게 교행을 시도했다는 과거 정황을 볼때 이미 예견된 살인행위였다는 유가족의 ‘미필적 고의’ 주장에 좀 더 귀 기울였어야 한다.
어쩌면 우발적 범죄보다 더 잔인한게 미필적 고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찰나의 순간 고민했을 그 많은 머릿속 생각의 악의(惡意)을 알아낼 방법이 없기에 더 그렇다.
죽어도 할 수 없어와 설마 죽기야 하겠어 사이에서 우리가 고민하는 오늘, 피해자는 얼마나 큰 고통을 받고 있는가.
당해보지 않은자가 어찌 그 아픔을 알까. 그래서 가슴이 더 먹먹해 진다.
고미선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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