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지연 우송대 외래교수 |
영화의 제목 문라이트는 인물과 소재가 대놓고 어필하는 사회적 메시지의 뉘앙스 때문인지 ‘인권달빛’ 내지 ‘평등달빛’ 같은 것으로 해석되는 관점이 대세다. 이에 나의 해석안을 보태어 영화의 의미와 개념의 색채를 다른 방향에서 더 풍부하게 밝힐 수 있다면 좋겠다.
우선 내게도 주인공 샤이론과 그의 첫사랑 케빈이 십 년만에 만나는 식당 씬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영화엔 의외의 보편성이 섬세하게 펼쳐져 있다. 인종차별 내지 소수자차별 문제를 뛰어넘는 힘은 어쩌면 순정에 있는가보다. 서로 달라서 끌리고 마는 사랑이 곧 평등의 최종 안착지인 것이다. 샤이론의 뒷모습을 따라가며 나는 진심으로 설?다. 흑인도 아니고 게이도 아닌 내가 그의 감정에 완전히 동화될 수 있었던 건 영화적 장치에 의해 아름답게 조작된 시공간 덕분이다.
다시 제목 이야기로 돌아가서. 달빛에 반사되는 흑인 아이들은 푸르단다. 그런데 말이다. 흑인, 황인, 백인은 있어도 청인은 없지 않나. 다 같이 검어졌거나 다 같이 하얘진 것도 아니고, 아예 현존하지 않는 새로운 피부색이 굳이 거론된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검은 소년을 푸르게 만들어주는 희망이 아직 현실의 바깥에 있어, 고로 현실은 여전히 암울하여, 달이 화면 안에 잡히지 않은 것이라는 관점을 정설처럼 받아적다가는 “달빛이 없어도 모두가 푸르게 되는 세상” 운운까지 나와버린다. 하지만 왜 멀쩡한 흑인이 백인과 황인과 분간도 안 되게 모두 똑같이 푸르게 보여야 하나? 영화가 그런 유치한 수준의 평등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영화가 제목으로 내세운 ‘문라이트’란 [비루하고 익숙한 현실을 새롭고 다르게 감각하여 일상적인 삶에 어떤 낭만의 숨결을 불어넣도록 돕는 영화 자체]이기에 어린 샤이론은 그 ‘영화달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스크린 한가운데에 서 있었던 것이다. 문라이트는 밤처럼 까맣게 암전된 극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스크린의 빛, 바로 영화의 빛이다. 카메라로 통하는 관객의 시선이 주인공에게 달빛이고 희망이다. 달은 화면 바깥에 있을 수밖에 없다. 달이 곧 카메라 렌즈 너머 ‘나=관객’의 눈동자라면.
하얀 종이도 붉은 조명 하에선 붉게 보이기 마련이다. 그건 조명에 의한 거짓일까. 원래 영화란 게 조작된 담론이다. 인식의 틀을 결정하는 조명으로서의 달빛이란 [‘조작된 감각’을 통한 ‘진실한 환상’], 다시 말해 감독이 영화상에서 이미 각종 소리와 색감의 아름다운 배치로써 구현해온 그토록 신비로운 영화적 순간의 마법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모네가 포착해낸 빛의 미학을 떠올려도 좋고, 무엇보다 감독이 오마주한 왕가위의 필름이 그러하듯 말이다.
결론적으로 ‘푸르게 빛나는 흑인 소년’은 기계적으로 추구되는 차별 없는 세상의 이상적 경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어두운 극장 안의 달빛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환상적으로 낯선 진실을 가리킨다. 보잘 것 없는 삶을 비추는 카메라 필터이자 스크린의 빛이 문라이트다. 흑인 성소수자의 삶에도 작게 빛나는 낭만의 순간이 깃든다는 것을 잊지 말고 살아가자. 그게 이를테면 ‘영화달빛’이 주는 평등의 힘이다. 모두의 삶이 그렇다. 보잘 것 없지만 한편 신비롭다. 진짜 힘센 위로는 여기에 있다. 빛바랜 블루란 아주 특별한 왜곡이다.
샤이론은 <문라이트>라는 제목의 ‘문라이트=영화’ 안에서 푸르게 빛나고 관객은 ‘어두운 밤=극장’ 안에 앉아 <문라이트>라는 제목의 ‘문라이트=영화’를 본다. 포스터의 소년은 정확히 이 순간을 보여준다. 나의 ‘눈’이 ‘달’처럼 그를 푸르게 비춘다.
송지연 우송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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