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목원대 금융보험부동산학과 교수 |
이후에도 베트남과 중국은 남중국해의 파라셀군도(시사군도)와 프래틀리군도(난사군도)에서 영유권 분쟁을 지속하고 있다. 2011년 5월 중국 해군이 무력으로 베트남 석유 탐사선의 해저 케이블을 절단하자 베트남에는 중국에 대한 격렬한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베트남 정부는 중국이 파라셀 제도를 점령한다면 육로로 공격하겠다는 엄포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2014년 5월, 그 전해 10월에 이루어진 양국 간의 남중국해 자원공동 개발 합의를 중국이 무시하고 파라셀군도 근처에 원유 시추 시설을 강행 설치하자 베트남에는 이에 대한 반발로 반중(反中)시위가 벌떼같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100명 이상의 중국인이 다치거나 살해되고 급기야 베트남 내 중국인이 소유한 공장들이 불타 잿더미가 되고 화교들이 탈출하게 되었다. 결국, 중국해군은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베트남과 중국 간의 침략과 투쟁의 오랜 역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베트남은 기원전 179년 중국에 침략을 받은 후부터 기원후 938년까지 1000년 이상 중국에 병합 통치되었다. 그동안 독립을 위해 끊임없는 투쟁을 하던 베트남은 938년 중국 원정군을 격파한 응오꾸엔이 이듬해 응오왕조를 세웠는데 이는 중국 통치에서 벗어난 최초의 베트남인의 왕조였다. 그 이후에도 중국의 침략에 대한 베트남인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981년 침입한 송나라를 온 국민이 하나되어 물리친 베트남은 중국의 힘이 약해지자 1075년 10만 대군으로 베트남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중국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1406년 명나라의 침략으로 1428년까지 중국에 다시 통치를 받게 되었으나 10년간의 투쟁에서 승리하여 다시 독립을 하였다. 청나라 때인 1788년에 29만의 청군에 의해 침략을 당하였으나 베트남은 무릎을 꿇지 않고 수륙양면작전과 기습전으로 저항하여 청나라 건륭제의 대군을 거의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중국에 대한 이러한 베트남 국민의 단합된 끈질긴 투쟁의 역사가 없었다면 베트남은 벌써 윈난, 광동, 티베트처럼 중국에 합병되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강대국 중국에 결코 굴복하지 않는 불굴의 투쟁을 통해 자국을 지키며 중국과의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강대국에 합병되지 않고 살아남은 베트남의 생존방법인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사드보고 누락조사와 관련된 문제로 들끓고 있다. 지난주 딕 더빈 미국 상원의원이 방한하여 문재인 대통령과 만난 후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이 사드를 원치 않는다면 사드 배치 및 운용에 소요되는 9억 2300만 달러를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도 있다고 대통령에게 말했다고 전하였다. 이는 더빈 의원이 작심하고 한국이 원치 않으면 이미 들여놓은 사드까지도 철수할 수 있다는 것을 공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덧붙여 “내가 한국에 산다면 북한이 쏟아 부을 수백발의 미사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드를 원할 것 같다”고 하면서 그러한 정서가 한국에서는 논의를 지배하지 않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고 하였다.
사드는 미국이 자국의 예산으로 한국에 배치하여 주한미군 기지를 북한의 미사일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다. 그러나 주한미군이 한국을 지키기 위해 주둔하고 있다는 면에서 사드는 결국 한국을 지키기 위한 것이 된다. 주한미군은 물론이고 평택 이남의 한국 국토의 절반 정도가 사드 방어 범위에 포함된다. 자국방어를 위한 사드배치를 중국이 반대한다고 국론이 분열되어 찬반논란을 이토록 오랫동안 벌이고 있는 이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베트남이라면 과연 어떻게 했을 것인가!
이정호 목원대 금융보험부동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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