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4일 선수단과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대전한화생명이글스파크를 찾은 김성근 전 한화이글스 감독. 전날 사퇴한 김 감독은 선수단 미팅 후 한 팬으로 받은 꽃을 들고 차를 기다리고 있다 = 이상문 기자 |
②한화와 김성근 감독의 939일…무얼 남겼나
③10년 암흑기…감독만의 책임인가
④한화 본격적인 프런트 야구 펼치나
한화 이글스와 김성근 감독이 결국 결별했다. 한화는 23일 “김성근 감독을 해임하기로 결정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사실상 경질이라는 현장의 이야기다. 이별 과정이 어찌 됐든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이로써 김 감독은 끝내 3년 계약 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유니폼을 벗었다. 김 감독은 한화에서 331경기 152승 3무 176패(승률 0.463)로 기대했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숙원인 팀의 우승과 포스트 시즌 진출은커녕 5할 승률에도 못 미쳤다.
한화와 김 감독의 만남은 화려했다. 몇 년간 꼴찌를 전전하던 한화는 팀을 완전히 탈바꿈시켜줄 강력한 리더를 원했다. 한화 팬들은 약팀을 강팀으로 만드는 능력이 탁월한 김 감독의 영입을 원했다. 몇몇 극성 팬들은 한화그룹 본사에서 1인 시위를 펼치고, 청원 영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김 감독은 한화 이전 6개 팀을 모두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고, SK왕조를 세우면서 KBO리그를 지배했었다. 그렇게 야인으로 있던 ‘야신’김 감독은 다시 한국프로야구에 등장했다.
김 감독은 취임사에서 “경기는 이기기 위해 하는 것이다. 이기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승리 그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며 한화를 강팀으로 변모시킬 의지를 나타냈다.
김 감독은 강도 높은 훈련으로 팀 체질 개선에 돌입했다. 흙투성이가 된 선수들에 팬들은 환호했다. 구단이 일임한 전권을 바탕으로 빠르게 조직을 장악했다. 그리고 2015시즌 한화는 KBO리그 중심에 있었다. 팬과 미디어의 관심 속에 한화는 KBO리그 최고 인기 구단으로 떠올랐다. 매 경기를 포스트시즌 같이 치르며 경기의 재미를 더했다. 하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시즌 후반 선수들이 체력적인 어려움을 겪으며 6위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2016시즌에도 결과는 비슷했다. 이사이 김 감독의 입지도 좁아졌다. 막대한 투자에도 성과를 내지 못하자 ‘찬사’는 ‘혹평’으로 바뀌었다. 특타로 대변되는 과도한 훈련과 투수혹사, 특정선수에 의존한 투수운영, 감독 중심의 경기 운영 등이 논란이 됐다. 결국, 김 감독은 2017시즌 명예회복을 노렸지만, 43경기만을 치르고 한화와 이별하게 됐다.
김 감독과 한화의 이별과정은 매끄럽지 못했다. 사실 김 감독의 이별은 현장에서 모두 예견했던 일이었다. 전권을 쥐고 선수단을 장악하던 김 감독으로서는 구단의 권한 축소는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지난 시즌 초반 부진한 성적과 투수혹사 논란이 고개를 들 당시 김 감독이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았다. 이때 이미 이별의 징조가 있었다. 시즌을 마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한화는 감독 출신의 박종훈 단장을 영입하며 김 감독의 권한을 1군 운영으로 제한시켰다. 당시에도 김 감독은 사퇴를 고민했지만, 팬들과 선수단을 생각해 구단 측 조건을 수용했다. 이후 김 감독과 박 단장은 여러 차례 마찰을 빚었다. 스프링캠프 혈전부터 1·2군 선수 운영, 트레이드 등에서 충돌했고, 언론에 노출됐다. 결국, 김 감독은 21일 경기 후 2군 선수 훈련 문제로 박 단장과 다시 충돌했고, “이런 식이면 벤치에 앉을 수 없다”고 엄포를 놨다. 코치들과 그룹임원에게도 본인의 뜻을 전했다. 김 감독으로서는 그게 사퇴로 이어질 줄 몰랐다. 하지만, 구단은 김 감독의 사의 표명 수용 여부를 논의했고, 일부 언론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수습할 수 있는 단계를 넘었다. 결국, 그렇게 김 감독은 한화 유니폼을 벗게 됐다. 김 감독은 좁아진 입지에 더는 팀을 끌고 갈 수 없었고, 구단은 김 감독에 대한 적대적인 대중의 관심에 부담을 느꼈다.
프로야구를 들었다 놨던 한화 이글스와 김성근 감독의 만남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이상문 기자 ubot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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