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중(영화평론가/영화학박사) |
영화 속 사람들이 밥을 먹듯이 나 역시 극장에 들기 전 밥을 먹었다. 영화관이 시장으로 이어지는 대로변에 있으므로 시장 안 공영주차장에 차를 대고는 중교 어름의 국밥집을 찾았다. ‘아트시네마’로 예술 영화를 보러 가는 사람이 먹기에는 좀 그렇지만, 나는 예의 관행대로 부추가 푸짐한 투가리에 들깨까지 듬뿍 쳐서 땀을 내가며 국밥을 먹었다. 그러고는 천변의 바람을 시원하게 맞으며 자못 따가운 해거름 볕을 피해 시장 골목 안으로 들어간다. 순대 등속을 파는 좌판과 불교사, 상포 가게를 지나 큰길가로 나오면 곧 허름한 소극장이 있다. 도무지 이 모든 정경이 ‘아트’하지가 않다.
도대체 삶은 무엇이고, 예술이란 무엇인가. 방금 지나온 시장 골목의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고 있었다. 그럼 예술은? 영화는 줄곧 경계와 표면을 미끄러지는 대화, 삶의 부질없음에 탄식하면서 또다시 꿈틀대는 욕망에 몸부림치는 인물들의 모순을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들이댔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컴컴한 극장에서 혼자 보며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스크린 속 인간들의 행태는 삶인가, 예술인가. 누구도 답을 주지 않는다. 나도 답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극장에 앉아 영화를 보며 삶을 생각하고, 존재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이다. 홍상수 영화가 대개 자기반영적이지만, 이 영화는 특히 배우 김민희와의 스캔들에 대해 해명하는 듯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주연을 맡은 김민희 역시 현실과 예술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물을 잘 그려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란 말이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예술은 삶을 그려내며, 현실을 반영한다. 삶을 담아내는 예술이란 한 걸음 물러서 그것을 바라보게 하는 거울과도 같다. 혹은 한 발짝 다가가 들여다보게 하는 창문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지난 늦가을부터 봄이 오도록 미증유의 현실 속에 치열하게 살아왔다. 이제 한 걸음 물러서는 거리 혹은 한 발짝 다가서는 깊이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과 현실을 성찰하고, 타인과 세계를 사랑하게 하는 여유가 될 것이다. 눈부신 5월, 가까운 사람과 영화 한 편을 보든지, 아니면 서점에 들러 시집 한 권을 읽는 것은 어떨까. ‘삶을 위한 예술’의 여유를 누리기 위해.
김대중(영화평론가/영화학박사)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