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우난순 기자 |
‘화양연화(花樣年華)-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 검붉은 장미가 막 피어나는 5월의 이 봄날을 사는 사람들은 가장 아름다운 인생을 맞고 있을까. 내 인생의 화양연화는 언제였나. 냇 킹 콜의 감미롭고 나른한 ‘Quisas’가 아직도 귓전에 맴도는 영화 ‘화양연화’는 장만옥을 위한 영화다. 낭창낭창한 버들가지 같은 가냘픈 몸매를 드러내는 치파오의 화려한 색체는 얼마나 고혹적인가. 이 영화를 본 여성관객이라면 한번쯤 입어보고 싶은 치파오의 매력을 한껏 뽐낸 장만옥의 몽환적인 눈빛과 몸짓은 다른 여배우는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이 영화에 부여했다.
화양연화는 가슴을 아리게 하는 영화다. 시작도 해보지 못한 채 끝내야 하는 아픈 사랑의 결말을 받아들이는 남녀의 운명론적 체념에 나 역시 아쉬움을 안고 극장문을 나서야 했다. 그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이 영화를 돋보이게 하는 훌륭한 장치지만 현실이라면 어떨까. 양조위는 영화 속 ‘차우’라는 남자의 캐릭터를 잘 살려냈다. 머리카락 한올 내려오지 않은 올백 머리에 말쑥한 양복차림의 모습은 160㎝를 갓 넘을 것 같은 단신의 양조위가 결코 왜소해 보이지 않는다. 한치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는 단정한 모습은 칼같은 냉정함을 보여주지만 그 이면엔 겁많은 남자의 소심함이 느껴진다.
히틀러, 스탈린, 양조위, 그리고… 그들의 내면세계는?
양조위는 싱가포르로 떠나기 전에 장만옥에게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는 그런 감정이 아니었는데 걷잡을 수 없이 바뀌어갔소. 나는 나쁜 놈이오.” 이런 잔인한 이별선언이 어딨을까. 겁많은 남자 양조위는 세상의 평판에 갇혀 도덕적으로 우월한 남자로 남는 선택을 함으로써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겁이 많은 사람은 내면에 상처를 안고 있다. 그 상처는 때론 대단히 깊고 복잡하다. 상처가 인간의 심성 깊숙이 잠재해 있는 것이다. 어릴 적 경험이 인간 정신의 60%가 형성되는데 이때의 상처가 성인이 되어 겪는 어려움의 원천이 된다. 공포정치로 악명을 떨쳤던 히틀러와 스탈린은 수많은 인명을 학살한 20세기의 쌍둥이 악마로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은 철저하게 주민을 통제하면서 무자비하게 절대적인 권위를 내세웠다. 두 독제 체제하의 사람들은 새로운 체제에 소속되기 위해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과 진실을 희생시켜야 했다. 히틀러와 스탈린은 현실을 왜곡하고 반대자들을 무섭게 탄압하면서 그러한 간극을 메우는 일에 전념했다.
프로이트는 장래 성격 형성에 소아기 4년 동안이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정돈되고 평화로운 가정 환경에서 성장했더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무시무시한 악마같은 히틀러는 인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지 않았을 것이다. 권력에 굶주린 살인자로 알려진 스탈린 역시 최고 권력을 손에 넣자 마자 잠복해 있던 정신병적 충동들이 풀려나와 대학살을 저질렀다. 그는 그냥 사람을 투옥하고 죽인 게 아니었다. 정신과 신체에 고문을 가해 그들을 가장 치욕스런 방식으로 무너뜨렸다. 거기서 그는 깊은 만족을 얻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스탈린이 어릴 적 경험 때문에 인격장애가 있었다는 것이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예에서 보듯이 어린시절의 상처와 결핍은 성인이 되어 열등감과 불안의 원인이 된다. 이런 유형의 인간이 지도자가 되면 많은 사람을 고통에 빠뜨린다. 아들 부시나 박근혜처럼 평범하지 않은 가정환경에서 자란 지도자로 인한 후유증이 얼마나 큰가.
권력자는 야생을 떠도는 겁먹은 한 마리 이리에 불과할 뿐
이런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현상은 일반 조직문화에서도 발견된다. 상명하복식의 수직적 구조에서 갑과 을은 엄연히 존재한다. 재밌는 사실은 을이 계급장만 달면 그악스런 갑으로 변신한다는 것. ‘시집살이 당해본 며느리가 더 악독한 시어머니가 된다’는 말처럼 고난을 겪은 권력자는 위험하다. 그들은 한풀이 하듯 마음 밑바닥에 쌓인 분노를 표출한다. 그들의 결핍과 열등감은 억압의 근원이 되어 부하직원들에게 절대복종을 강요한다. 자신의 비위를 건드리는 행위에는 가차없는 응징과 불이익을 준다. 마키아벨리는 “권력자들은 사랑받기 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데서 더 큰 안전을 느낄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에게 두려움의 대상인 권력자도 사실은 야생을 떠도는 겁먹은 한 마리의 이리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후배가 들려준 후배 회사의 높으신 상사는 치를 떨게 했다. 노조 일로 눈밖에 난 직원들은 조직적으로 중요업무에서 배제하거나 묵살함으로써 결국 회사를 그만두도록 한다고 했다. 후배는 일거수일투족 감시하고 겁박하는 일에 맛들인 그 실세가 공포에 떨고 있는 쥐를 잡아먹기 직전에 갖고 노는 고양이 같다고 했다. 후배에게 말했다. “그렇게 자신이 없을까. 그 사람도 자리 지키려고 그러는 거야. 불쌍하게 생각해.” 우리 안의 최순실은 언제나 존재한다. 문재인 정부는 어떨까.
우난순 기자 rain4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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