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지연 우송대 외래교수 |
내가 애인과 가족을 사랑하듯, 강아지와 고양이를 사랑하듯, 짜장면과 라멘을 사랑하듯 나를 사랑하는가. 내가 나를 떠올리면 함박웃음을 짓게 되거나 눈물이 나는가. 내가 나에게 설레는 것은 가능할까. 본인의 목소리가 달콤한가. 제 자아가 귀찮았다가 마음이 쓰여 애틋하고 그리운가.
어여쁜 당신을 쓰다듬고자 나도 모르게 손이 가는 마음이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늘 외롭다.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주체는 분명히 나인데, 그 감정이 가닿고 싶은 곳은 내 바깥에 존재하는 당신이요, 그 감정이 바라보는 대상은 어디까지나 나와 분리된 타자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늘 타자의 목적어를 필요로 한다.
반면 믿음은 의외로 이성적인 것이다. 강한 믿음은 광신이나 맹신에 얽혀 흔히 비이성적인 상태로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우린 어떤 명제를 사실 또는 진실이라고 판단했기에 믿는다. 거짓이라고 판단했다면 믿지 않을 것이다. 종교적 믿음도 마찬가지다. 믿지 않는 사람에겐 잘 이해되지 않지만 믿는 사람에겐 그것이 사실이고 진실이다. 정치인에 대한 믿음도 그러하다.
고로 한 사람이 누군가를 믿어준다는 건 무조건적 헌신, 무지한 기대, 불가해한 열정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그 누군가에 대한 나름의 지적 판단에 근거하는 것임을 서로가 존중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 근거가 꼭 객관적 요소로만 이루어져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형성된 편견이나 외모에 대한 미감 등 주관적 요소도 당연히 끼어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기준 상 팩트 또는 팩트처럼 보이는 것들이 믿음의 전제이자 필요조건으로 작동한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취업준비생에겐 스펙이나 합격 후기가 믿음의 근거가 될 것이고 종교인에겐 성경과 같은 기록물일 수 있겠다. 과학자에겐 실험결과일 것이며, 문학평론가에겐 텍스트다.
같은 맥락에서 자존감이란 내가 나를 사랑하는 감정이 아니라 나에 대해 스스로 가지는 믿음에 가깝다. 누군가를 신뢰하는 사고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세상의 시선이 규정하는 팩트 요소가 어느 정도 요구된다는 얘기를 앞서 했는데, 자존감을 위해서도 객관적으로 규정된 최소한의 무언가를 갖추는 편이 낫다. 꼭 대외적으로 폼나는 조건이 있어야만 한단 얘기는 아니지만 마중물 하나 없이 나이브하고 막연한 자아분열적 사랑고백을 해봤자 밑빠진 독에 물붓기가 될 확률이 높다.
자신의 뚱뚱한 몸을 사랑한다고 아무리 크게 외친들 뚱뚱한 몸이 진정으로 아름답다는 납득과 믿음 없이는 열등감이 해소될 수 없다. 심각한 고도비만이라면 살을 빼는 것이 낫고 정 거슬리는 부분은 성형수술을 하는 게 낫다. 적어도 이때에 인문학적 성찰 같은 한가한 소리는 도움이 안 된다. 한편 피하지방이 자아내는 말랑하고 포근한 육체미를 정말로 납득했을 시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믿음의 신비로운 힘이다.
믿음은 믿음의 대상이 쌓은 실질적 업적에 대한 세상의 시선과 사실관계, 그에 대한 나만의 해석과 안목을 안팎으로 동시에 믿는 것이므로 왜곡 없이 독해하고자 하는 정직한 노력이 수반되지만 가끔은 사랑이 믿음을 왜곡시킨다.
당신을 믿는다는 말은 당신에 대한 나의 생각과 판단을 믿는다는 말이다. 사랑의 목적어와 다르게 믿음의 목적어 뒤에는 그것을 믿는 주어의 자리가 재귀적으로 숨어 있다.
그래서일까. 누구나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해 내심 자부심이 있다. 때론 자신이 좋다고 믿는 것이 남에게도 좋을 줄 알고 스스럼없이 권하고 다니다가 빈축을 산다. 종교와 정치 분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유권자들은 대통령 후보로 나온 인물을 믿는 것이기보다 실은 그 후보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믿는 마음으로 투표장에 나선다. 선거일은 자신을 사랑하라는 흔한 말로는 쉬이 오르지 못할 자존감의 실체적 자기증명을 믿음의 조용한 실천을 통해 해볼 수 있는 날이다. 선거야말로 시민사회의 자존감 수업이다. 나는 우리 사회가 좌충우돌하면서도 선거를 통해 자존감을 조금씩 훈련해왔다고 믿는다.
송지연 우송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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