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
남녘 봄바람과 꽃바람은 죄인 이순신, 불효자 이순신, 못난 아비 이순신의 길을 따라 바다를 건너고 육지를 달려 양력 4월 19일, 서울 의금부 감옥에 그를 홀로 남겨두고 북으로 갔다. 전쟁터에서 빗발치던 일본군의 총탄이 아니라, 임금과 대신들의 결심에 따라 생사가 오가는 28일의 감옥 생활 끝인 5월 16일, 백의종군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봄꽃을 즐기고, 지지하는 대통령 후보를 따라 편을 갈라 논쟁하는 우리와 극단적으로 다른 한 참된 사람의 가슴 아픈 봄날이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 감옥에서 봄을 만난 그 마음이 어땠을까. 또 지금 이 땅의 상황과 우리 모습을 본다면 뭐라 할까.
감옥을 나온 그날, 그의 일기는 “맑았다. 감옥문을 나왔다.”로 시작한다. 눈이 시리게 화창한 봄날, 따사로운 봄볕을 그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5월 18일, 일찍 길을 떠나 그 유명한 ‘백의종군’을 시작했다.
조선의 바다를 호령했던 수군 대장이 계급장도 없이 육지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묵묵히 걸었다. 애간장만 녹였다. 눈물과 한(恨), 고독과 번뇌, 절망과 고통, 절치부심과 도약의 길이었다. 마침내 9월 13일,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임명되었고, 10월 26일 13척의 전선으로 일본군 133척을 격파했다. 명량의 기적이다. 백의종군은 처벌의 한 종류였지만, 그 이후 위대한 재도약의 여정을 상징하는 단어, 불멸의 이순신 그 자체가 되었다. 그래서 보통사람들은 그의 삶을 알기에 백의종군을 감히 쉽게 입에 올리지 않는다.
우리사회에서 가장 쉽게, 자주 입에 담는 사람들이 있다. 정치권 패자들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에도 예외 없이 등장할 단어가 백의종군일 듯하다. 그 말을 울먹이며 떠난 뭇 패자들의 행적을 보면, 패배를 인정하거나 책임을 지거나 다시 민심을 얻기 위해 진짜 백의종군을 했던 사람은 없는 듯하다. 도망치듯 외국으로 떠났거나, 잔꾀를 부려 훗날을 도모할 지역으로 내려갔다. 다시 등장할 그 사이에도 국민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간당간당한 권력의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한줌 무리와 함께 어두운 골방에서 갇혀 지냈다. 때가 오면 철새가 되어 나타났다. 그들이 타락시킨 ‘이순신의 백의종군’이다.
진짜 이순신의 백의종군은 그들처럼 패배했거나, 도망치며 떠드는 변명꺼리 백의종군이 아니다. 그가 다시 조선 수군을 재건하러 길을 재촉할 때, 백성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 “다시 오셨으니, 우리들은 살 길이 생겼습니다!” 패배 앞에서 도망친 그들, 권력욕의 화신인 그들과 이순신의 백의종군의 차이이다. 패자들이 오염시킨 백의종군이란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이제는 새로 대통령이 된 사람의 첫마디에서 나오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백의종군 선언’을 듣고 싶다. 국민 속에서, 국민과 함께, 국민을 하나로 만든 참된 이순신의 백의종군을 실행하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 현장에서 소통하는 열린 귀의 대통령, 누구라도 광장에서 대통령을 얼싸안을 수 있는 기회가 많은 친구 같은 대통령, 함께 울고 눈물을 닦아주는 평범한 이웃 같은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 외세의 위협 속에서도 국가와 국민에게 자부심과 자존심을 지켜주는 당당한 대통령을 갖고 싶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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