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1세/출처=나무위키 |
프랑수아 1세(Francis I, 1494~1547))는 앙리 4세와 더불어 프랑스 사람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왕이다. 앙리 4세가 루이 14세와 더불어 대왕 칭호를 받을 정도로 군사, 정치 등에 뛰어난 명 군주였다면 프랑수아 1세는 문화적으로 열세였던 프랑스에 문화적 토대를 마련하여 프랑스 르네상스의 아버지로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 문화군주였다.
프랑수아는 아들이 없었던 루이 12세의 딸인 끌로드(Claude de France 1499~1524)와 결혼하면서 21살(1515년)의 나이로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는 대외정치와 경제면에서는 성공적이 못했지만 호탕하면서도 너그러운 성격으로 당시에도 프랑스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젊은 혈기의 왕은 영토 확장을 목적으로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불패를 자랑하는 스위스군대를 물리치며 밀라노를 점령했다(프랑수아는 이 전투에서 유일하게 이겼다). 그러나 전승의 기쁨보다도 컸지만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와 미켈란젤로, 라파엘 등이 만들어낸 이탈리아의 절정기 르네상스의 풍요로운 문화에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다 빈치에게 푹 빠져 63세의 노예술가에게 파격적인 연금과 프랑스 최고의 궁정화가의 지위를 제시하며 프랑스로 초대했다. 당시 별다른 후원자가 없었던 다 빈치 또한 그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여 프랑스에서 노년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이리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을 동경해 마지않던 프랑수아 1세는 1516년 당시 63세였던 거장 다 빈치를 프랑스로 모셔 가는 기회를 획득했다. 올 수가 있었다.
그러나 파격적인 대접을 받으며 지낸 3년여 동안 다 빈치였지만 새로운 정착지인 프랑스에서는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화가이자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기술자, 해부학자, 식물학자, 도시 계획가, 천문학자, 지리학자, 음악가 등등 모든 면에 박식한 지식으로 마음만 먹는다면 어느 누구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경이로운 일들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결과적으로는 프랑수아 1세의 초상화조차도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프랑수아나 다빈치 모두에게 별 도움 없이 안 다 빈치는 죽고 말았다.
그러나 이 대가의 죽음은 프랑수아 1세와 프랑스에게 엄청난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다 빈치가 이탈리아를 떠나오면서 소지한 작품은 <모나리자>, <밀라노 귀족부인의 초상>, <세례자 요한>, <동굴의 성모>와 루이 12세가 주문했던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모자상> 이었다.
다 빈치의 진품으로 인정된 작품수가 열서너 점에 불과함을 감안한다면 사실상 다빈치가 한 평생 제작한 대부분의 작품이라 할 정도로 대규모였다. 당연히 예술적 안목과 거시적인 경제적 안목으로 프랑수아는 모두 구입했다. 이로써 다빈치를 낳은 것은 이탈리아지만 현존하는 다 빈치의 가장 많은 작품을 소유한 나라는 프랑스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 1503~06년, Oil on panel, 77 x 53 cm, 루브르미술관 |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품, <모나리자>는 <최후의 만찬>을 제치고 레오나르도의 대표작이면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품으로 인정받는다. 스푸마토(sfumato) 기법으로 표현한 애매모호한 미소는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는 루브르의 보물이자 프랑스의 자랑거리다.
Mona Lisa는 리자 부인이라는 뜻으로 모나(mona)는 영어의 Mrs. 이고 리자(Lisa)는 이 그림 모델의 이름이다. 가난했던 리자는 16세에 피렌체의 거상이자 홀애비였던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Francesco del Giocondo)의 세 번째 부인이 되었다.
어린 부인을 극진히 사랑했던 프란체스코가 어린 부인인 리자의 초상화를 당대 최고의 화가인 다 빈치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3년을 작업하고도 일단 별 관계가 없는 사람의 초상화를 다 빈치는 돌려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프랑스에 갈 때도 가지고 갔다. 단순한 초상화라 하기에는 이상한 면이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그림의 모델이 리자가 아니라 다 빈치가 18년간 지냈던 밀라노의 공작 루드비코 스포르차의 애첩인 체칠리아, 루도비코의 처형인 만토바 공작부인 이사벨라 데스테, 다 빈치의 어머니 카테리나 심지어는 다 빈치 본인이라고 했다. 2011년 연구 결과는 다 빈치의 제자이자 동성연인인 살라이라고했다.
프랑스 소유가 된 모나리자는 퐁텐플로성에서 루브르로 옮겨 다니며 많은 고생을 했는데 1911년에는 도난을 당하기도 했다. 루브르미술관 복도에 걸려 있던 모나리자가 절도자에 의해 사라진지 2년 만에 되찾기는 했지만 이때부터 모나리자는 독방에서 철저한 감시 속에 살아야했다.
그러나 풀리지 않는 외교문제를 위해서는 해외 나들이도 했는데, 미국, 일본, 러시아였다. 1963년 첫 해외전은 미국의 워싱턴국립미술관과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었는데 개막식에는 당시 프랑스의 문화부장관 앙드레 말로와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직접 참석할 정도로 양국 간의 큰 이슈였다고 한다.
이 전시를 위해 모나리자는 보험 가입을 했고, 이 때 보험사가 보험료를 산출하기 위해 추정한 그림 가격이 우리 돈으로 1조 원 가량이었다. 2010년에 어떤 경제학자가 루브르의 수입원을 감안한 계산법으로 산출한 금액은 대략 40조 원이었다. 1년 관광객은 약 850만(2010년 기준) 중 85%가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루브르를 찾는다는 입장료가 근거라고 한다.
아무튼 세계에는 값을 따질 수 없는 유명하고 가치 있는 예술작품이 많지만 전 세계인이 가장 사랑하는 그림은 모나리자라는데 의의가 없다. 모나리자가 프랑스에 있는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프랑수아 1세의 공로이니 어찌 콧대 높은 프랑스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경애 보다아트센터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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