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첩산중 시골에서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나는 여느 시골 소년과 마찬가지로 공부보다 노는 것에 익숙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받아쓰기를 하면 늘 100에서 0이 하나 빠진 점수를 받았고, 2학년 때는 구구단을 외우지 못해 매일 같이 나머지 공부를 하고 선생님과 함께 하교를 했다. 덩치가 크고 힘이 세서 골목대장을 도맡아 했으며, 학교에서 터진 사건의 대부분이 나와 연관되었다. 말 그대로 ‘문제아’였던 것이다.
일생일대의 사건은 3학년이 된 첫 주에 벌어졌다. 담임 선생님이 키 크고 멋진 남자 선생님이셨는데, 반장선거 전까지 임시 반장을 하고 싶은 사람 손들라고 하셨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자 나의 인생을 바꾼 한 말씀을 하셨다.
“야 거기, 제일 뒷줄 키 큰 놈. 네가 임시 반장해라.”
줄반장 밖에 해본 적이 없는데 임시반장이라니…. 쉬는 시간에 이곳저곳에서 수근대는 소리가 들렸다.
“저 바보가 임시반장이래. 참 어이가 없다 그치?”
너무 창피해서 선생님이 원망스러웠다. 집에 돌아가는 길 내내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오기가 발동했다. ‘임시 반장도 반장이니 내일부터 열심히 해보자!’ 다음날부터 생활태도를 완전히 바꾸었다. 전교에서 가장 일찍 등교해서 교실 환기, 책걸상 줄 맞추기, 칠판 정리, 교실 청소…. 그야말로 모범적인 활동을 했다. 구구단과 받아쓰기를 열심히 연습해서 첫 받아쓰기와 구구단 점검에서 100점을 받은 것이다. 나를 욕했던 아이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대단하다며 칭찬을 해 주었다.
1주일 후 반장선거 날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친구 한명이 나를 추천해 주었고 1, 2학년 내내 반장을 해 왔던 친구를 이기고 진짜 반장이 된 것이다. 바보가 반장이 되었다.
선생님께서 축하해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세상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너희들이 바보라고 놀렸던 이 친구가 1주일을 열심히 노력해서 반장이 되었다. 어렵다고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하다보면 이 친구처럼 꼭 성공할 것이다.”
선생님의 임시 반장 임명과 축하 말씀이 지금도 내 가슴 속 깊이 남아 있다. 그 말을 가슴에 안고 열심히 살다보니 중학교 3학년 때까지 반장과 전교회장을 한 번도 빼먹지 않고 하게 되었고 바보로 놀림 받던 내가 교사가 되어 19년째 교사 생활을 하고 있다. 믿음을 준 우연한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나의 제자에게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유달리 이 학생이 생각나는 것은 예전의 나의 모습이 생각나서다. 10년 쯤 전 6학년 담임을 할 때 일이다. 전교 학생회장에 입후보한 우리 반 학생이 있었다. 성격도 활발하고 교우관계도 좋았으며 성적도 우수한 학생이었기에 무난히 당선되었다.
그 학교에는 전교 학생회장 어머니가 학부모회 회장이 되는 관행이 있었다. 안내장을 보내드리고 며칠을 기다려도 참석에 대한 답장이 없어 전화를 드렸더니 어머니께서 울먹이시며 말씀하셨다.
“우리 아들이 제가 학교에 가는 걸 창피하게 생각해 가정통신문을 보여주지 않은 것 같아요. 죄송해요. 선생님.”
회장을 불러 물었더니 울먹이며 장애인 엄마가 창피하고 다른 친구들이놀릴까봐 학교 오시는 게 싫어 말씀드리지 않았다고 했다. 어머니께서는 한 쪽 다리를 절룩이셨다. 그것이 창피해서 회장은 어머니가 학교에 오시는 것을 꺼려했던 것이다.
예전 학창시절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7년 연속 반장과 전교회장을 한 나에게도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었다. 아버지는 술꾼이셨고 어머니는 문맹 이셨다. 어머니께서 학교에 오시면 무식함이 탄로 날까봐 이런 저런 핑계를 대서 한 번도 학교에 못 오시게 했다. 그런 죄를 짓고 살았기에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너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시고 회장으로 만들어 주신 분이 누구냐? 바로 네 어머니시다. 네가 어머니를 창피하게 생각한다면 세상 어떤 사람이 네 어머니를 사랑하고 고마워하겠느냐? 어머니께 사죄드리는 편지를 쓰고 전교생 앞에서 발표 하거라.”
회장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효도 할 것을 다짐하는 편지를 전교생 앞에서 울먹이며 발표하였고 전교생이 눈물바다가 되었다. 그 후 어머니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학교에 오시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불편하신 어머니를 부축하고 다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10여년이 지난 지금 그 학생은 훌륭한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하였고 1년에 한 두 번씩 찾아와 소주잔을 나누는 스승과 제자가 되었다.
내가 겪은 두 가지 일은 참으로 소중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교사의 말 한마디가 제자의 마음을 움직여 인생까지 바꾸었다. 말의 소중함을 깊이 새기고 제자들의 마음을 헤아려 다독여 주며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따뜻한 말을 하는 교사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최근세 조치원대동초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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