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중(영화평론가, 영화학박사) |
재심 신청을 위해 방문한 관청에서 다니엘은, 다른 지역에 살다가 이사해서 저소득층 지원 신청을 하려 하지만 약속 시간에 조금 늦었다는 이유로 불가 판정을 받은 여성과 그녀의 두 아이를 만난다. 아이들을 돌보며 방송통신대학에라도 진학하려는 꿈을 지닌 케이티에 대해 연민과 동정을 지니게 된 다니엘은 그녀의 집을 찾아 이것저것 고쳐 주고, 아이들의 친구가 된다. 극도의 빈곤 속에 꿈도 자존감도 잃어가는 케이티에 대해 유사 아버지 혹은 든든한 이웃이 되어 주는 다니엘은, 그러나 재심 신청이 받아들여지려는 순간 심장 마비로 죽는다.
장례식장에서 케이티가 대신 읽는 다니엘의 편지는 뜨거운 감동을 자아낸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의 점도 아닙니다. 나는 묵묵히 책임을 다하며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나는 굽실대지 않고 이웃이 어려우면 기꺼이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나의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필자는 아버지를 생각했다. 평생을 성실하고 떳떳하게 사신 아버지. 그리고 나라가 어렵고 집안이 가난하여 꿈과 재능이 있었음에도 빛나는 자리를 누리지 못한 우리 시대의 많은 아버지들을 떠올렸다. 지금은 요양병원에 누워 먼 길을 준비하고 계신 아버지는 다니엘 블레이크처럼 억울한 상황을 겪진 않으셨다. 하지만 급격한 세상의 변화 속에 평생의 수고와 자부심은 고사하고 정보화, 세계화의 뒷전으로 밀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극심한 사회적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 속에 세대 간의 조화로운 이해와 배려가 절실하다. 100세 시대를 살아야 하는 많은 어른들을 그저 뒷방 신세로 내몰아서는 안된다. 시대 변화 속에서 어려움을 겪는 상황을 적절히 도와드려야 한다. 또한 그분들의 원숙한 지혜와 경험이 우리 사회를 성숙하게 하는 밑거름이 되도록 해야 한다.
한 편의 영화는 판에 박힌 현실의 쳇바퀴를 초월한 꿈과 환상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때로는 생각 없이 익숙하게 살아가는 현실의 구조적 모순을 재발견, 재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한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으로 2006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던 켄 로치 감독이 10년만에 내놓은 걸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그 어떤 시대적, 사회적 변화보다 사람이 가장 중요한 가치임을 강력하게 깨우치는 영화이다.
김대중(영화평론가, 영화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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