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 시절 대통령의 전담통역관을 하던 때였다. 정상회담이나 국제회의에서 대통령의 입 역할을 한다는 것은 단지 외국어 능력 이상의 능력이 요구되는 일이다. 실수가 절대 용납될 수 없는 희소한 직종이기에 부담감 또한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도 기억한다.
어느 날 컨퍼런스 후 노무현 대통령이 일개 통역관에 불과한 필자를 서너 번 개인적으로 부른 적이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서른 살 정도 된 대통령의 통역관은 대단해 보일지 모르지만,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에게 서기관이라는 직급이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
너무 긴장되어 양복이 흥건할 정도로 땀에 젖어있는 필자에게 그분께서 건넨 첫 말씀은 이렇다. “자네는 어디서 그렇게 영어를 배웠는가? 내가 자네에게 잘 보여야겠네. 밉보이면 어떻게 통역을 할지 모르니. 내 마음이 자네 마음이고, 자네 입이 내 입이 아니겠나.”
그 한 마디가 대통령으로서는 물론 인간 ‘노무현’이라는 사람의 진정성과 됨됨이를 담아내기에 충분하지 않았는가. 지금도 그 감회와 기억은 생생하다. 정치인이기 이전에 사람. 최고 권력자이기 전에 우리와 같은 사람. 때로는 우리보다 더 허당이고 나약함이 느껴지기도 했던 분. 그렇지만, 누구보다도 질기고 강했던 분. 그런 분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셨다는 사실이 지금까지 마음은 너무 아프지만 너무 행복하기도 하다.
아무도 그 분께서 대통령에 당선되실 것으로 예상하지 않았었다. 국민도 언론도 대부분이 그랬었다. 하지만 그분은 이변(異變)을 일으키며 당당히 대통령에 당선됐다. 역시 선거는 결과가 나오기까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런데, 그 결과가 과연 우리들이 말 하는 ‘이변(異變)’이었을까. 필자는 결코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다. 그 분이 잡초처럼 세상을 살아오시면서, 불특정 다수의 정치세력들과 국민들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소위 말하는 ‘준비된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가급적 많은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 심지어 적군까지도 자신에게 매력을 느끼게끔 만드는 그 분만의 장점.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결과는 아닐 것이다.
얼마 전 필자는 국회 기획재정위원장인 4선의 ‘자유한국당 ‘조경태’ 예비대선 후보의 대변인을 맡은 적이 있다. 작금의 대한민국 현실을 감안할 때 어쩌면 필자가 오해를 받고, 욕을 먹는 것은 스스로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한국당의 조경태 의원과 야당 소속일 때부터 호형호제 하는 사이다. 그리고 진영과 이념을 넘어 그런 소신 있는 정치인, 더 정확히 표현해 인간으로서 내 스스로가 좋아할 수 있고 존경할 수 있는 정치인의 부탁에 기꺼이 돕고 싶었던 것이 전부였다. 조 의원도 그랬다. 대선후보의 대변인을 하면서 끝내 입당도 안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그럴 수 있다. 필자는 특정 정당을 도운 것이 아니라, 괜찮은 사람 즉 그런 정치인을 돕고 싶었던 것이 전부였으니까.
필자가 고 노무현 대통령의 전담통역관을 했을 때는 진보주의자였고, 이명박 전 대통령을 모셨을 때는 보수주의자였다고 볼 수는 없지 않겠나. 물론 당시에는 공무원의 신분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정치는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목적과 가치도 사람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당도 이념도 현실에 비추어보면 결국 악세사리에 불과하다. 곧 대선이 예정된 이 시점에서 각 정당의 유력한 대선 후보들에게 묻고 싶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처럼 혹은 ‘조경태’ 의원처럼 과연 본인의 소신과 확신과 용기의 원천이 사람 즉 국민에게 있는지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길 바란다.
지금 대한민국에 온전한 진보와 보수가 과연 존재하는가. 이쯤 되면 이제 유권자인 우리 국민들도 정당과 이념논리에 현혹되지 말고 사람 곧 그 정치인 자체를 보고 판단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각 정당을 대표하는 유력 대선 후보들은 그냥 집권을 해야만 하니까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각 정당과 후보들 자체가 자신들이 집권을 해야만 하는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설득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고 싶다. 본인들도 스스로는 느끼지 않는가. 이런 선거의 가장 전형적인 행태가 소위 ‘네거티브’ 즉 상대방 흠집 내기 아니겠나. 자신만의 유별난 경쟁력이 없을 때 나타나는 지금의 현실은 과거 도떼기 재래시장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 아닌가.
어느 때든 북한의 도발이 예상되고, 미국과 중국이라는 양강이 대한민국을 사이에 두고 자신들의 이익에만 혈안이 돼 있는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언제까지 그 식상한 정당논리, 이념논리를 가지고 우리 국민들 스스로 정치판을 더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야 하겠는가.
대선주자들에게 단호히 요구하는 동시에 묻는다. 말 같잖은 논리와 지극히 식상한 정치적 ‘레토릭(rhetoric)’ 말고 명확하게 논리적으로 우리 유권자들을 납득시킬만한 현실적인 공약과 아울러 각자의 경쟁력과 정체성을 분명히 보여주길 바란다. 필자의 요구와 질문이 과연 무리한 요구이고 답하기 어려운 질문인가.
김민 데일리폴리 정치연구소장(前 청와대 대통령 전담통역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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