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우난순 기자 |
언니 잘 지내? 그러고 보니 언니한테 처음으로 편지를 쓰네. 봄비가 오고 있어. 언니와 작별하던 날도 오늘처럼 비가 내렸지. 쥐똥나무엔 막 꽃이 피기 시작하고 민들레꽃이 대지를 노랗게 물들이던 봄이었는데, 그 날은 하루종일 줄기차게 비를 뿌려댔어. 핏기가 가신 파리한 입술의 언니는 얼굴이 백지장같이 하얘서 낯설고 무서웠어. 그 얼굴을 한번 만져보고 싶었지만 차마 손이 움직여지질 않더라.
이른 아침 장지로 떠나는 영구차에 올라 유리창에 머리를 박고 물끄러미 밖을 쳐다보는데 모든 게 꿈만 같았어. 유리창을 때리는 소나기 소리는 어찌나 크게 들리는 지, 봄에 이렇게 비가 많이 온 적이 있었나 생각할 정도였어. 이젠 봄비가 와도 예전처럼 설레지가 않아. 산에 들에 촉촉이 내리는 봄비를 맞으며 달콤한 감상에 젖어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게 됐어.
죽음에 대한 고뇌는 누구도 비껴갈 수 없는 인간의 철학적 명제
비가 내려 질척거리는 산비탈길을 올라 깊게 파인 땅속에 언니가 묻히는 걸 보고서야 비로소 실감했어. 언니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죽었다는 것을 말야.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본 어린 유리 지바고의 처연한 눈빛이 잊혀지지 않아. 엄마의 관이 차가운 구덩이에 들어가는 걸 멍하니 바라보다가 자작나무 잎들이 바람에 날리는 허공을 응시하는 유리 지바고의 눈빛에 난 가슴이 철렁했었어. 인간 실존에 대한 고뇌는 누구도 비껴갈 수 없는 철학적 명제 아닐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언니 장례식 내내 난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가 없었어. 내 가족이 죽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차분할 수 있을까. 난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인가. 눈물은 커녕 끼니때마다 육개장과 수육이 맛있다며 밥 한공기 국에 말아 싹싹 비우는 나 자신을 보며 당황스러웠지. 언니 친구들이 와서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위로하는데도 난 남의 일처럼 아무런 슬픔이나 고통의 감정을 느낄 수가 없었어. 가족 중에서 최초로 맞는 죽음 앞에서 난 너무나 무덤덤했고 눈물 한방울 나오지 않았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남의 집 장례식에 와 있는 듯한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런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머릿속은 혼란스러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어.
후에 심리학 관련 책을 보고 알게 됐어. 예기치 못한 상실로 충격을 받을 때 몸과 마음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그 충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는 거야. 재빨리 감정과 감각을 마비시켜 충격이 몸과 마음으로 들어오기 못하게 한다고 말야. 언니가 갑작스럽게 가면서 난 상실의 고통을 껴안을 힘이 없기 때문에 감정선이 마비돼 버린 거야. 머리로는 죽음을 이해하지만 내 감정의 회로는 차단돼 울고 싶어도 입에선 웃음이 비질비질 비어져 나오는 고통스런 현상을 이해하게 됐어.
고통으로 굳은 마음 정화되도록 죽은 이에 대한 애도를 제대로 해야
우리 가족들이 언니에 대해 부채의식이 크다는 걸 언니는 알까? 예전부터 엄마· 아버지가 자주 회한에 찬 말씀을 하시곤 했어. “그때 형편이 안돼도 중학교에 보낼 걸. 느이들 언니가 배웠으면 뭘 혀도 한 자리 혔을텐디....” 언니가 초등학교 6학년때 담임 선생님이 집으로 찾아와 언니를 중학교에 꼭 보내라고, 명석하고 공부 잘하니까 아깝다며 애석해 했다던데. 언니가 살아있다면 예순 세살이겠네. 6남매의 맏딸로 태어난 언니는 우리의 희생양이었어. 배움에 대한 갈망이 컸는데도 속이 깊어 어린 나이에도 내색도 안했다며 엄마 아버지는 더 마음 아파하셔. 요즘 엄마가 건강이 부쩍 나빠지셨어. 작은 언니 말이 언니 일로 충격을 받아 그런 것 같다고 하더라. 어느 부모가 자식 앞세우고 온 정신으로 살아낼까.
천지간의 만물이 돌고 돌듯 생명력이 샘솟는 봄은 왜그렇게 찬란하고 아름다울까. 다시는 생명의 땅이 아닐 것처럼 기나긴 겨울이 지나면 어김없이 마른 가지에 싹이 돋고 꽃을 피우잖아. 모든 이들이 이 봄에 찬사를 보내기에 여념이 없지만 내 가슴 한켠엔 무거운 돌덩이가 얹어져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해. 언니에 대한 애도를 뒤늦게 치르고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지금 언니에게 편지를 쓰고 있어. 눈물은 고통으로 딱딱하게 굳은 마음을 정화시켜 주듯이 이 편지는 이젠 언니를 온전히 보내는 의식이 될 거야.
일찍이 엘리어트가 읊은 것처럼 4월은 참 잔인한 달이야. 우리에게 깊은 생채기를 낸 세월호도 그렇고 제주 4.3사건도 그렇고 말야. 어느 산골짝에 이름 없이 피었다 지는 꽃처럼 사람도 그렇게 간다는 말도 못하고 스러져 가잖아. 자연의 이치가 그런 거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의 아픔이 너무나 커. 떠난 사람을 죽는 날까지 잊을 순 없어도 지상의 사람은 새순이 돋아나도록 생명의 물을 뿌려야 하지 않을까. 이젠 안녕.
우난순기자 rain4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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