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욕구가 활발하게 움직이며 영적인 제훈련장인 신학대학원에서는 오후 5시의 저녁기도(만도)에 이어 오후 9시에 마지막 기도(종도)를 올린 후 다음날 아침기도를 마치는 6시 반까지 ‘대침묵’이라고 부르는 시간을 갖습니다. 밤동안의 대침묵은 신의 사람을 만든다는 전통에 따른 이 규칙은 형식으로는 있었지만 실제로는 잘 지켜지지는 않았습니다. 대침묵 동안 독서도 할 수 있는 느슨한 규칙이었고, 밤 동안의 대침묵은 신의 사람들을 양성하는 곳의 밤 생활의 분위기를 드러내는 언어입니다. 밤사이에 내 입의 활동을 멈추게 하고 신의 소리를 듣고자 하는 대침묵은 낮의 시끄러움을 잠재우고 고요함에 우리를 머물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온갖 물질의 구속에서 벗어나 영적 인간을 맞이하고자 하는 것이 대침묵이 주는 가치입니다. 대침묵이라는 신의 소리를 듣는 시간을 통해 새날의 아침을 맞이하여 신의 소리에 따른 진리로 활동하기를 바라는 낮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를 돌아보니 신이 기뻐하는 인간이 되는 대침묵이 내 자신에게 적용되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왕성한 청년시절의 열기로 인하여 그 가치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그냥 흘려보냈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깝습니다.
해가 진 이후부터 하루가 시작된다는 것이 히브리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밤부터 하루가 시작된다고 믿었던 것의 출발은 곧 어두운 밤에 신의 소리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신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자의식이 신의 소리를 듣는 것을 우선시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삶에 적용되어 교회력을 만들고 사순절의 고통이 지나고 부활절이 오는 것을 세운 것입니다. 보통 춘분이후의 첫 번째 보름달이 뜬 후 첫 주일을 부활절로 잡는데, 이는 결국 그리스도 전통에서 부활절이 태양력이 아닌 태음력을 기준으로 잡는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침묵과 어둠이 내린 후에 부활의 새로운 삶을 맞이하는 것이 신의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신이 선택한 인간으로서 신의 소리를 들어 시끄러운 세상의 소리를 잠재워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 남아 있는 모습이 수도원입니다. 이러한 수도원적인 삶은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사는 연약한 현대인에게 인간적으로 살 길을 제공해 줍니다.
오늘날 과학기술이 급격히 발달되는 우리사회는 물질로 인해 풍요로와진 듯 하지만 너무나 많은 물질들은 다른 한편 누군가의 빈곤과 고통을 낳고, 모두가 물질을 차지하려는 욕망과 행동으로 인해 때로는 어떤 사람에게는 숨이 막혀 못살 지경이 되었고 자신마저도 결국 인간의 존엄성이 사라진 모습으로 인하여 무력한 삶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연약하고 무력해진 자신 속에서 보다 더 인간적인 새로운 영적인 삶이 시급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의 소리를 듣고 신에 의지해서 삶을 세우는 수도원적인 대침묵을 통한 인간의 존엄성을 발견하는 영적인 가치를 익히고자 한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존엄은 물질로 인해서라기 보다는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는 신이 머무는 자리에서 이루어집니다. 교육과 법은 바로 이 인간의 존엄성을 위하는 자리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최고의 가르침인 종교 역시 인간의 존엄성을 꽃피우는 자리에 위치하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존엄성이 자리하는 곳이라면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인간이 존엄한 그 자리인 신이 주신 거룩한 곳에서 영적인 존재로 만나시기를 빕니다.
유낙준 주교(성공회 대전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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