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지연 우송대 외래교수 |
써먹을 수 없는 과목인데 왜 수강신청 했나요? 취업에 직접 도움되는 다른 공부하기도 바쁠 텐데 이 수업 뭐하러 들어요? 졸업 학점을 채워야 하기 때문임을 알면서도 장난스레 위악을 떨어본다. 그럴 때마다 문학과 별 상관없는 전공의 학생들이 되려 나보다 먼저 나서서 문학을 변호해주는 재미난 반응을 보인다. “문학은 써먹을 수가 없다”는 담백한 자조를 나는 이렇게 잘 써먹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을 한다면 도대체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학은 써먹을 수가 없다”의 다음에 놓인 문장이다. 그의 자문자답은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논증으로 우리를 이끈다.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는 문학은 바로 그래서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단다. 꼭 필요한 것일수록 부족하거나 결핍되었을 때의 답답함은 커진다. 우리는 자주 스마트폰과 시험성적과 돈의 쓸모에 휘둘린다. 반면 문학은 그다지 유용한 것이 아니라서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어차피 쓸모가 없으니 거꾸로 자유롭다는 것이다. 언뜻 말장난 같은데 막상 부정하기는 어렵다.
요즘은 인문학도 실용적이어야 한다. 심지어 써먹을 수 없는 인문학은 인문학이 아니란다. 이건 인문학의 이름으로 인문학을 억압하는 주장이다. 인문학 간판을 내걸고 팔리는 많은 메시지들이 대중의 불안에 기생한다. 안 배워두면 손해보고 뒤처질까봐 사려는 필수품. 교양과 행복을 위해 가지지 않으면 안 될 고급 사치품. 유용한 인문학은 그것이 유용하다는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할 것이다. 성공적인 호객은 외기 쉬운 염불로 완성된다.
물론 우리는 인문 고전을 읽음으로써 생각하는 힘을 키울 수 있다. 기존의 지식과 경험을 자기 언어로 꿰는 힘은 당장의 가시적 실용성은 아닐지언정 궁극의 실용성을 지닌다. 하지만 실용성을 의식한 나머지, 엄연히 인문학을 다루기로 약속된 자리에서, 관념보다 실체가 중요하다는 취지로 독서보다 경험이 중요하다는 말만을 반복하는 강사는 좀 이상하다. 경험이 독서보다 중요하지 않단 얘기가 아니다. 이론 수업의 형식, 강단이라는 물적 조건 안에서 해볼 수 있는 최소한의 경험조차 내팽개쳐서 나쁘다. 수백수천 권을 읽어봤는데 진리는 책 바깥에 있더라는, 그야말로 독서량 과시나 하느라, 책 한 권이나마 충실하게 논할 귀중한 시간을 때워버리는 행태 자체가 자기기만이다. 가만히 서서 운동예찬 떠들 바에야 밖에 나가 달리기라도 하든가.
‘관념의 모험’은 위대하지만 원래 인문학은 그 이상을 하지 못한다. 하지 못하는 것을 할 줄 아는 체하는 건 실용주의인가 사기행각인가. 관념을 언어로써 다루는 철학자가 수술용 칼을 쥐고 외과의사 노릇을 하고자 한다면, 영성으로 암세포를 제거하겠다는 사이비 구세주와 다를 게 무언가. 문학은 써먹을 수 없다던 김현의 정직이 새삼 빛난다.
인문학은 잠이다. 몸은 한없이 무력해지고 뇌는 신비로운 꿈을 꾼다. 문학을 몽상의 소산이라고 보면 통하는 구석이 있다. 잠을 잘 때 육체는 쓸모있는 생산활동을 전혀 하지 못한다. 고로 너무 바쁠 때엔 잠부터 줄인다. 효율을 위해 밤을 새워보지만 밤샘의 여파는 결과적으로 비효율을 낳는다. 꿈도, 노래도, 이야기도, 하루 권장 수면 시간만큼의 인생 지분을 가진다. 실용 인문학의 과대광고는 수면장애 환자의 귀에 대고 ‘잘자 내꿈꿔’를 비명소리로 내질러 잠을 방해하는 알람과 같다.
장자의 상수리나무 일화에서 나무는 목재로서 쓸모없어 보였기에 잘리지 않고 아름드리 생명을 부지했다. 목수의 쓸모가 나무에게는 죽음이다. 생명은 꼭 어떤 용도를 위해 써먹히고자 태어나 어디엔가 써먹으려고 돌보는 것이 아니다. 수면욕은 본능이고 우린 모두 잠을 잘 자야 건강하다. 송지연 우송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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