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
우리나라의 웬만한 중소기업은 물론 규모가 있는 기업조차 일정정도 이상 규모가 커지면 삼성을 롤모델 삼아 조직 혁신을 시도한다. 삼성의 조직 혹은 시스템이 가장 선진적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새로 소개된 직책도 우리 기업조직에 큰 영향을 미칠 듯하다. 그런데 위의 사람들이 모두 그 신설 조직을 각각 대표하는 사람일까.
이번 언론 보도 속의 직책에는 공통적으로 CRO라는 영문 약칭이 함께 붙어 나온다. 언론사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한글 직책에 CRO, 혹은 CRO·Chief Risk management Officer가 같이 언급된다. 이로 보면 그 조직의 대표는 한 사람인 듯하다. 삼성전자가 소개한 CRO를 각 언론사의 기자들이 각자 우리말로 번역했고, 그 결과가 다양한 직책명으로 보도되는 해프닝으로 나타난 듯하다.
삼성은 배터리 사고 이후 사고 원인 파악을 위한 노력을 치열하게 했고, 적극적이고 과감한 대책을 실시했다고 한다. 삼성전자의 고동진 사장 인터뷰에 따르면, 사고 이후 2중 3중 대책을 마련했고, 평일에는 아침마다 수원에서 관련 점검 회의를 했고, 토요일에는 공장에 가서 현장 점검을 했다고 했다. 세 달 동안이나 그렇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노력 이면에는 조직의 삼성, 시스템의 삼성이 갖고 있던 역설적 한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거대 기업이라는 한계 때문인지 제도와 시스템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현장이나 소비자로부터 상대적으로 멀어져 있었던 듯하다. 하향식 의사결정, 보고서와 책상 중심의 경영을 더 중시한 모습이다. 게다가 인터뷰 한 달 전에야 위기관리를 위해 부사장을 책임급으로 하는 조직을 만들었다고 한다.
위기, 위험은 우리 사회에서 몇 십 년 동안 현재형이었다. 하늘과 땅과 바다에서 연례행사처럼 수많은 재난이 반복되고 있다. 그 때마다 천재지변이 아니라 인재라고 통탄하면서 재발 방지를 수없이 발표했고, 무수한 대책들이 난무했다. 그러나 근본적인 처방은 없었고,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는 습관적 망각증이 다시 일상화되었다. 배터리 사고 역시 그런 익숙한 안일함의 결과가 아닐까. 재난의 나라에 있는 세계 최고의 기업조차 진지하게 우리 사회의 재난의 원인을 살피고, 반면교사로 삼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고동진 사장의 인터뷰는 신제품 발표를 위한 인텨뷰였지만, 후회와 탄식이 가득했고 솔직했다. 삼성전자는 배터리를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휴대폰 만드는 회사였기에 휴대폰에 집중했고 배터리는 검사 결과만 보고 판단했다고 사고 원인을 과감하게 인정했다. 그리고는 배터리 안전성 테스트도 삼성에서 직접 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는 말했다. “이거를 왜 진작 안했을까.” 또 “솔직히 배터리를 잘 몰랐던 것 같다. 배터리를 주어진 스펙대로 만들어 올 것으로 믿었지, 공정 깊숙이 들어가 보진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는 CRO를 책임자로 하는 전담부서를 설치했다.
역사에는 언제나 뒤늦은 후회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앞장섰던 류성룡은 “지난 일을 징계해 뒤에 있을 재앙을 막는다”는 뜻을 담은 ‘징비록(懲毖錄)’을 써서 사전에 대비치 못한 전쟁을 반성했다. 징비는 고동진 사장의 대책과 반성으로 충분하다.
‘주역’의 “서리를 밟으면 곧 두꺼운 얼음이 얼게 된다”, 고산 윤선도의 “군자는 얼음이 어는 조짐을 우려한다(君子慮氷漸)”는 말은 모두 사소한 징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귀들이다. 위기와 위험의 조짐의 의미를 미리 파악하고 대책을 세우기 위한 삼성전자의 CRO는 우리 기업 문화에 한 이정표가 될 듯하다. 그러나 CRO의 첫째 임무는 배터리 문제의 사후약방문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배터리 없는 휴대폰은 그저 쓸모없는 꺼진 휴대폰일 뿐이다. 또 컨텐츠와 소프트웨어가 부실한 휴대폰도 그저 전화기에 불과할 뿐이다. CRO가 진정한 비전을 갖을 때이다. 그 때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도 진정한 CRO가 등장해 재난을 조금이라도 막아낼 수 있을 듯하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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