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광 국립중앙과학관장 |
불경기의 심연 속에서 대통령이 탄핵당하는 초유의 정치 상황까지 겪은 지난겨울은 유난히 춥고 길게 느껴졌었다. 매년 찾아오는 봄이지만 그래서 이 봄이 더욱 소중하고 꽃잎 하나하나가 더욱 아름다워 보이나 보다. 다들 자기 몸 하나 추스르기도 어려웠을 텐데 나라 걱정에 잠 못 이루고 술잔을 기울이고 거리를 메웠다. 촛불이냐 태극기이냐 핏대 올리고 편을 갈라 격론을 벌인다고 걱정하는 이도 있지만, 이들 민초들 덕에 이 나라가 유구하게 이어져 오지 않았던가? 선거철이면 세상을 구할 듯이 떠들어 대는 정치인들이야 그때뿐이다.
아빠, 꽃은 왜 필까요? “씨를 만들기 위해서란다. 예린아”라고 말해 주었어야 했는데, 딸아이의 질문에 “글쎄?”라고 당황스러워 얼버무리고 말았던 오래전 기억이 아스라하다. 식물은 동물처럼 옮겨 다니며 짝을 만나 짝짓기를 할 수 없으니 가루받이를 도와주는 곤충을 부르기 위해 꽃을 피운다. 그렇게 해서 맺은 씨는 바람에 날리고 동물들 몸에 묻어 여기저기로 옮겨지고 새로운 꽃이 된다.
대개 잎이 나고 꽃이 피지만 개나리와 벚나무 같은 봄의 전령들은 잎이 나기도 전에 꽃이 먼저 핀다. 다른 식물과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남들보다 먼저 꽃을 피우는 것이다. 개나리는 꽃가루도 적고 꿀도 별로지만 다른 꽃보다 일찍 피기 때문에 곤충이 찾아와 꽃가루를 퍼트려 씨를 맺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추운 겨울을 밖에서 보내게 될 개나리가 안쓰러워 겨울이 오기 전부터 따뜻한 거실에 놓아두면 봄이 와도 꽃을 피우지 않는다. 꽃눈은 추운 겨울을 겪어야 위험을 직감하고 자손을 번식하기 위해 봄을 기다려 꽃을 피우는 것인데, 낮은 온도를 겪지 않으면 아무리 따뜻해져도 봄이 온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힘든 시기를 보내 봐야 그 고통을 알기에 기다리던 봄이 오면 어려웠던 때를 생각하고 씨를 뿌린다. 그리고 다시 온 추운 겨울을 곧 새봄이 온다는 희망을 품고 견딘다. 내일엔 또다시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는 희망이 있어 오늘 밤 시린 가슴을 안고 잠들 수 있게 된다.
다시 봄이다. 벌과 나비가 꽃잎 속을 드나든다. 혹독했던 겨울의 시련을 잊고 만물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그런데 유독 우리 이 땅의 민초들만이 춘래불사춘이라고 의기소침해져 있다. 아침이 왔으니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더듬거려 전깃불을 켜고 화장실에 들어가 볼일을 보고 거울을 보면서 눈곱을 떼야 비로소 오늘이 다시 시작되는 것인데 잠은 깼지만, 이불 속에서 아직 어제의 아픈 기억을 되새기고 있다면 생체 시계는 어제 그대로 머물 것이다. 봄이 왔는데도 꽃을 피우지 못하는 거실 속의 꽃나무처럼.
5월 8일이 되면 마치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처럼 기다리지 말고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치카치카’ 양치질하고 ‘어푸어푸’ 세수하고 ‘쓰윙쓰윙’ 드라이하고 구두 신고 현관문을 나서자. 웅크렸던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걷자. 입을 쫙 벌리고 숨을 크게 들이키자. 비로소 봄이 우리 곁에 온다. 이제 벌과 나비가 되어 꽃잎 속을 노닐기만 하면 된다. 꽉 막혔던 길이 트이고 시장통 국밥집 아주머니의 손길이 분주해지고 멈췄던 기계가 돌기 시작한다.
마침 4일부터 9일까지 대덕연구단지 중심부를 흐르는 탄동천변 숲 향기 길에서 벚꽃길 축제가 열린다. 탄동천 주변을 대전시민과 연구원이 즐겨 찾는 과학문화 생태공간으로 조성하기 위해 인근 11기관이 함께 마련한 행사이다.
매일 저녁 화려한 벚꽃과 함께 뉴에이지 음악페스티벌이 열리고 특히, 주말인 8~9일에는 벚꽃콘서트·버스킹 등 음악 행사와 벼룩시장, 시화전, 중고 책 바자 등 볼거리, 즐길 거리가 다양하게 마련된다. 겨우내 신발장 한쪽을 지키던 운동화를 챙겨 신고 아이들 손잡고 밖으로 나가보자. 추운 겨울을 이겨 낸 우리의 봄은 이렇게 시작된다.
양성광 국립중앙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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