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숙빈 을지대 간호대학장. |
그런데 우리 이름의 영문 표기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을 때가 왕왕 있다. 한국인의 이름 중에는 두 글자로 된 이름도 있고 네다섯 글자 이름도 있지만 대부분은 한 글자 성(姓)에, 두 글자 이름(first name)을 쓰고 있다. 그 중에 성(姓, last name)이야 따로 쓰니까 별 상관이 없지만 성이 아닌 이름(first name)을 영문자로 바꾸고 글자마다 띄어쓰기를 하는 경우 미국에서 중간 이름(middle name)이라고 부르는 이름자처럼 오해받기 십상이다. 물론 순수 한글 이름이 아닌 한자 이름일 때 주로 벌어지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홍길동’의 길동을 ‘Gil Dong‘으로 쓰는 경우 외국에 갔을 때 ‘길’은 중간 이름으로 여기고 ‘길동‘으로 부르기보다는‘동‘으로만 불릴 수 있다는 것이다.
뭐, 애칭처럼 끝 글자만 불러도 상관없다고 쉽게 넘길 수도 있지만 정체성은 ‘이름’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 정확해야 할 것이다. 필자의 경우 대학 교수이니 논문을 출판하는 경우 영문 이름을 쓰게 되는데 논문을 쓰기 시작한 30여년 전에는 미처 이런 저런 생각을 하지 못하고 영문으로된 이름 글자를 떼어 썼다. 이제 와서 로마자 표기법에 따라 성만 떼고 이름을 붙여서 쓰려니 이름을 요약하는 경우 초기에 쓴 내 논문이 다른 사람의 논문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검색되지 않기도 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 오래 된 여권의 이름도 띄어쓰기가 되어 있어 사용할 때마다 개운치 않은 느낌을 가지게 한다.
요즈음은 문화관광부에서 여권에 영문이름을 표기하는 방법을 정해놓고 컴퓨터에 한글로 자기 이름을 넣으면 영문자로 어떻게 표기하면 좋을지 몇가지씩 예시를 보여주고 있으니 처음부터 정확히 표기하는데 아무 어려움이 없다. 하긴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잘 모르는 게 더 큰 문제이다. 극성스러운 수준의 교육열로 기저귀 찰 때부터 영어공부를 시키는 젊은 부모들이여 기억하시라.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엠마니 올리비아니 이쁜 영어 이름 하나 더 지어주는 것보다 앞으로 세계시민으로 살아 갈 아이들에게 국제적 감각에 오해가 없을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 더 우선되어야 함을.
이름 이야기를 쓰다보니 아주 오래전 아이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지은 긴 이름을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함께 리드미컬하게 발음해서 인기를 끌었던 코미디(당시에는 개그란 단어를 쓰지 않았음)가 생각나서 검색해 보았다. 당시 유행이었던 그 이름은 ‘김 수한무거북이와두루미삼천갑자동방삭...’으로 시작해 무려 72글자나 되었단다. 그런데 검색하다 새로 알게된 사실은 이 이름이 코미디언이 만든 창작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래동화에 나오는 양반의 귀한 아들 이름 ‘김 수한무거북이와두루미삼천갑자동방삭’ 에 근거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유아 사망률이 높던 과거에 자녀가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라며 장수를 상징하는 아이콘들을 넣어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다. 한편 동화는 이야기답게 너무 긴 이름을 부르다가 오히려 위기를 맞이한다는 모순을 담고 있었다. 이름은 뜻도 좋아야 하지만 부르기에도 편하고 좋아야한다는 기능성을 넌지시 알려주려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이름을 어떻게 짓느냐는 철저히 개별적인 선택이겠지만 그 사람이 속한 사회 문화적 특성에 따라 유사한 패턴을 보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좋은 의미의 글자를 넣어 이름을 짓느라 집안 어른이나 작명가에게 의뢰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문중의 항렬을 따라 돌림자를 넣는 전통적 방법도 있지만 부모의 이름을 섞어서 짓기도 하고, 출생지에서 힌트를 얻기도 하고 종교적인 의미를 포함하기도 하는 등 매우 다양해졌다. 여하간 출생한 아이의 앞날에 대한 소망과 행복한 삶을 기대하는 이름을 짓는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그러니까 문화적으로 적절하고 국제화 시대에도 맞는 이름을 짓는 게 필요하다.
좋은 이름이 사람을 훌륭하게 만드는지, 사람이 자기 이름을 귀하게 만드는 건지 모르겠지만 부모님의 소망을 새기며 이름값을 해야겠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는 고사성어도 있듯이 우리 모두 명예로운 이름으로 남도록 노력해보자. 이름과 더불어 진솔한 삶의 기록을 남김으로써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자, 우선 귀한 내 이름자 만큼은 정확하고 그럴듯하게 쓰고, 그 이름에 어울리는 근사한 사람으로 살아보자. 비단 물결, 고운 이름의 제자가 떠오르는 시간이다.
임숙빈 을지대 간호대학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