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세열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 경영기획본부장 |
검찰은 “직무에 태만한 과학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한 정의의 심판”이라고 했고, 과학계는 “지진은 예측이 불가능한데 과학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현대판 갈릴레이 재판”이라고 했다.
과학자들은 법적 책임까지 묻는 것은 과하다고 주장하였지만, 2012년 1심재판부는 7명에게 징역 6년, 벌금 900만 유로의 유죄 판결을 내렸다. 항소심부터는 ‘과연 형사 처벌할 사안이냐?’에 관한 치열한 법리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6명의 과학자들에게는 무죄가, 1명의 공무원에게는 유죄가 확정 판결됐다. 과학자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은 이들에게 지진 위험성을 의도적으로 축소할 이유가 없었다는 판단에서였다.
근대법에는 고의나 과실이 있는 행위로 인한 손해에만 배상책임을 지게 하는 ‘과실 책임주의’가 원칙이었다. 그러다가 산업사회가 고도로 발전한 20세기에 들어와서 국가와 사회가 인정한 허용 위험 영역 이내의 구체적인 고의나 과실이 없더라도 타인에게 손해를 입히는 경우에는 사회 정의와 공평성에 입각한 ‘무과실 책임주의’가 적용되는 무한의 ‘위험책임’이 적용되기 시작했다.
과학자의 사회적인 책임의 확산은 제2차 세계대전 종식 후 전쟁에 등장한 대량 살상무기에 대한 과학계의 자성에서 비롯됐다. 또한, 21세기 들어서서 생명, 환경, 식량, 에너지, 자원, 정보 등의 분야에서 과학기술의 파급효과가 커지고 부작용도 등장하면서 과학연구의 사회적 의미와 영향이 이슈화됐다.
과거에는 과학자의 책임 한계가 실험을 하거나 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다른 연구나 실험 결과 등의 표절이나 연구 과정에 조작이나 날조 등에 관한 연구윤리의 범위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과학적 결과를 활용해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까지를 포함해서 책임을 져야한다는 무과실책임주의가 확산되고 있다. 예를 들어 선의로 개발된 다이너마이트가 무기로 변질된 것에 대해 노벨이 무한의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다.
선진국들은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함의를 모았고, 일본도 2000년 ‘차기과학기술기본계획(안)’에서 과학기술자의 활동에 대한 사회적 설명을 제시했다. 우리나라도 2004년 ‘과학기술인 헌장’을 선포하면서 과학 기술인이 지녀야 할 여섯 가지 덕목 중에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윤리의식을 명문화 한 바 있다.
과학자들도 사회적 수용력이 뒷받침 되지 않는 과학기술은 존재 가치를 상실한다는 인식이 정착되면서 사회적 책임을 더 크게 느끼기 시작했다. 특히 라퀼라 지진 재판을 지켜보면서 대형 재난 상황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고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과학자는 확답이 아닌 확률로 말해야 한다는 권고들도 나왔다. 높은 오류율을 보일 수 있는 확정적 예측보다는 개연적 예측을 제공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과학적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 일각에서는 과학자에 대한 과도한 사회적 책임이 과학기술 연구를 위축시킬 수도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지만, 과학기술과 국민안전의 접점에 있는 원자력안전기술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필자 역시 과학자의 무과실책임주의와 무한의 사회적 책임이 오늘날의 시대정신이자 사회적 정의임에 공감하는 바가 크다.
이세열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 경영기획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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