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길선 행복도시 세종사진작가 회장 |
연동면에 소재한 열녀문에는 두 여인이 있는데 이들은 한 가문의 시어머니와 며느리다. ‘양세정려기와 열녀정려기’기록에 의하면 시어머니는 손씨로 16세에 출가하였으나 임신 4개월이 되던 해에 남편과 사별하였고, 며느리인 성씨 부인은 18세에 출가하여 20세에 아들을 낳았으나 4개월 후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를 두고 당시 홍문관 교리 조진만은 정려기에 “난초가 골에 피었으나 그 향기 멀리도 가누나"라고 두 여인의 정절을 칭찬하였다.
또한 전동면에 소재한 열녀문에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장례를 치르고 형제를 한자리에 불러놓고 “내가 평소 너의 아버지를 정성껏 받들지 못하여 돌아가셨다”면서 나 혼자 남아 福을 누린다는 것은 婦德의 길이 아니므로 너희 아버지 뒤를 따르는 것이 지어미의 본분이라면서 ‘형제간에 화목하게 살라’는 유언을 남기고 음식을 전폐하여 7일만에 남편의 뒤를 따랐다.
이웃 열녀문의 효부 羅氏부인은 부부 금슬이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남편이 병을 얻어 13년간 병고에 시달리다 죽고 말았다. 부인은 밤낮으로 눈물로 세월을 보냈으나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 현명한 婦德’ 이라고 다짐하고 시부모와 자녀를 봉양하고 이후 시부모가 노환으로 사망하게 되자 3년간의 시묘를 하고 뒤를 이어 생을 마감하였다.
전의면 정려문에는 효자 가문으로 시집왔던 金氏 부인이 사별한 남편을 따라 자결해 그해 정려문이 세워졌다고 되어있다.
여인들의 행적은 서로 달랐지만 나라에서 정려문을 세워 본보기로 삼았다. 현재는 어떠한가? 네 쌍이 결혼하면 이중 한 쌍은 이혼한다는 통계가 있다. 효자는커녕 부모를 학대하고 금전적인 문제로 살해하는 등 패륜적인 소식들을 뉴스를 통해 접하고 있다. 그리고 어느 학자는 미래에는 세 번 결혼한다고 예견하고 있다. 선조들이 이런 내용을 알았더라면 아마 기절했을 것이다. 시대에 따라 삶의 방식은 다르지만 가족이란 구성원은 과거나 현재가 다를 바 없다. 그 시절의 생활을 알지 못하고 평가하는 것은 분명 잘못되었다. 그러나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한 여인은 남편이 죽자 부덕의 소치라면서 어린 두 아들을 남겨놓고 남편을 따라 죽었고, 다른 여인은 산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 부덕이라면서 자식과 시부모를 공양하였다고 되어 있다. 내용은 분명 대비가 된다. 어느 여인이 지혜로운 것일까? 나라에서는 정려의 기준을 어떻게 했을까? 그 시대에도 세도있는 가문에게 지금과 같이 은덕을 베풀었는지 궁금해진다.
자결과 수절이 가문의 미덕인가? 아니면 시대가 만들었나? 역사이지만 열녀문은 시대의 족쇄같아 숙연해졌다.
유길선 행복도시 세종사진작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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