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티 이미지 뱅크 |
예전에 미국 대통령 후보 선두 주자로 달리던 모 상원 의원이 미모의 모델과 섹스 스캔들로 정치 일선에서 하차한 일이 있었다. 이 문제로 미국의 조야가 술렁였다. 미국의 대통령이라 함은 단순히 자국 내의 최고 통치자로서 뿐 아니라 자유 민주주의 진영의 대변인이 되어 세계적 인물로 부상하는 까닭에 더욱 이목의 초점이 되는 것 같다.
사회적 윤리 측면에서 불성실한 정치인은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고 거침없이 몰아붙이는 미국의 높은 의식 구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런 섹스 스캔들을 벌인 당사자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음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자신의 잘못을 기자 회견을 자청하여 이러면 어떨까?
“미안합니다. 순전히 실수였습니다. 정치 일선에선 물러나겠습니다. 나도 한 인간이고 남자이기에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미안합니다.”
솔직히 시인하고 그의 신사적인 매너와, 그들 사회만이 갖는 지적 포용력에 실로 경이를 느낀다. 아메리카 대륙 민족의 호방한 멋이 넓은 캘리포니아 대평원에서 피어나지 않았나 생각된다.
우리 사회에 그러한 사건을 옮겨 가정하여 본다. 우리 사회의 정치인이나 지도층이라면 어떻게 할까 아마도 적당한 이유와 궁색한 변명으로 부인 내지는 합리화시켜 어떻게 하면 그 순간을 넘겨 자신의 위치를 지킬까 고심하는 비겁자가 많을 것이다. 이른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일이 비일비재 했던 탓에 이런 짐작을 하게 된다.
영국이 낳은 위대한 시인 바이런은 '스스로 부족함을 아는 것이 배움의 첫 걸음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조국의 연안을 떠나며 이렇게 읊었다.
“나는 영국을 사랑하노라, 온갖 흠 있는 그대로를!”
인간이란 어쩌면 미완의 인격이어서 잘못을 하며 사는 게 당연할지 모른다. 그러나 고등동물인 인간은 가정과 사회에서 생활 및 교육을 통해 자신의 잘못에 대해 어떻게든 변명하고 모면하려 든다.
어떤 연사가 많은 대중 앞에서 연설을 하던 중에 원고 대목을 잊었다 하자. A라는 연사는 그 순간을 다음과 같이 위트로 넘겼다.
“여러분, 엊저녁에 오늘의 연설 연고를 외울 때 아내가 자꾸 옆에서 치근덕거리는 바람에 이 대목을 잊었지 뭐예요. 이 점은 순전히 제 아내 탓입니다.”
이렇게 잠시 대중과 웃고서 다음으로 넘어간다면 얼마나 분위기가 부드러운가.
반면 B라는 연사는 잃어버린 원고의 대목에서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더듬거리면서 얼렁뚱땅 실수를 덮어버리려고 했다 하자. 그러면 많은 사람들은 그 연사의 실수를 실수로 받아들이지 않고 잘못으로 인정해 버릴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노라면 본의 아니게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있다. 이때 그것을 그럴듯한 사유를 들어 합리화 내지는 정당화하려고 들지 말고, 곧장 상대를 찾아가 정중히 사과를 하고 그 간의 경위를 솔직히 털어놓으며 대책을 상의해야 한다. 그러면 상대도 거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내 주위엔 H라는 친구가 있다. 그는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약속을 해 놓고는 나타나질 않아 신용이 없다. 즉, 지킬 수 있으면 만나고, 자신이 없으면 아예 연락도 없이 자신이 있을 때 까지 두문불출하는 것이다. 보다못해 어느 날은 H를 만나 이렇게 얘기했다.
“여보게, 사람 하는 일이, 어쩔 수 없이 약속을 못 지키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게 아닌가, 그럴수록 상대를 만나 안 되면 안 된대로 사정을 얘기하여 차선책을 숙의해야 하지 않나, 물론 미안하겠지만 떳떳이 만나 신용도 지키고 상대도 지켜야지. 그렇지 않으면 신용도 잃고 상대도 다 놓친단 말일세. 앞으로는 개선해 보게.”
그런 후 H는 가급적 그 방법을 활용하여 자신을 찾아 가는 것 같았다.
얼마 전 어느 세미나에 참석해 30대 이혼녀의 그럴만한 사회 환경적 윤리의 변론을 들었었다.
그녀는 보편적인 가정에서 태어나 보편적인 교육을 마치고 집안 누구의 소개로 이른바 엘리트 신랑감을 만나 전격적인 결혼에 이르렀다. 그런데 주위의 부러움과 갈채에도 불구하고 살아갈수록 답답하고 사무적이고 산술적인 남편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합의 이혼을 했단다. 마지막 결별의 순간까지 남편은 법학도답게 완벽한 수속과 절차를 걸쳐 깨끗한 법적처리까지 마쳤다.
애초에 신랑감을 만날 때는 부족함 없이 성장하여 승승장구 권력과 명예를 얻은 그가 오히려 선망의 대상이었다. 신랑은 유치원, 국민학교, 중·고등학교를 우등으로,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장학금을 받아 대학원을 마친 후 미국 유학까지 다녀왔다. 성장과정이 어디 하나 흠 잡을데 없는 완벽한 사람이었다. 딸 가진 부모라면 침을 흘릴 만한 신랑감에 틀림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신랑은 태어나서 학교를 마치고 사회에 나오기까지 쉼표하나 없이 성장하였다. 매사가 육하원칙에 논리적 사고 방식이여서 일상이 두렵고 피곤하더란다. 식사하는데도 순서에 따라야 하고 더러 부부싸움을 하면 그 후 잘잘못을 가리는 토론과 결론, 앞으로의 예방책까지 제시되어야 했다. 그 여인은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세미나를 마무리 했다.
“길지도 않은 인생을 무모히 타인의 틀에 얽매여 구속될 이유가 없습니다. 서로 다른 길임을 느끼고 갈라서기로 했습니다.”
그 동안 형틀에 묶여 살았던 지난날을 통분해 하는 30대 이혼녀의 고백에 공감이 갔다. 부부란 서로 부족함을 보완하며 메꾸어 줄 때 감동과 사랑을 느끼는가 보다. 역시 미완의 인격에 어떤 향기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내가 그대의 오른팔을, 그대가 나의 왼팔 역할을 해주어 난해한 세상을 서로 동지처럼 아끼며 살아가는 것 말이다.
어쩌면 인생이란 부족함을 안고 태어나는 것일지 모른다. 살아가면서 본의든 타의든 잘못을 범하고 그 오류를 인정하여 차후엔 덜 범하려는 자세에 인간의 미덕이 있는 것이다. 넓디넓은 광야의 세상, 길고 긴 인생의 여정을 가다보면 미완의 우리 인간은 모순과 잘못 투성이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이 실수를 인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겸연쩍고 미안하다는 것은 그 만큼 그 사람의 마음속엔 인간만이 갖는 순수한 양심과 도덕적 기준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못나면 못난대로 자신을 인정하고 앞으로는 참고하여 잘 하겠다는 솔직한 진실성은 인간만이 갖는 멋이다.
서구 사조에 젖은 미국인들은 지도자를 보는 시각이 엄격한 것 같다.
“미국인들은 순수한 보이스카웃과 같은 도덕적 인물만이 공직에 오르는걸 원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위대한 지도자들은 보이스카웃도 아니고 선악을 모두 지닌 야누스적인 사람들이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사회는 긍정과 비판이 어우러져 민주주의의 꽃을 피운다. 격의 없는 그들의 용기와 매너, 이는 아메리카 대륙의 신사만이 할 수 있는 호방한 멋인가 싶다.
김우영(작가·대전중구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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