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구 특허청 특허심판원 심판관 |
이정구 특허청 특허심판원 심판관은 “전산화를 꿈도 꾸지 못했던 그 시절에는 특허공보라고 해서 출원된 자료를 모두 종이서류로 만들어야 했다.
골무를 끼고 매일 서류를 뒤적이는 것이 일상이었기에 특허공보는 특허청의 생명이었다”고 말했다. 1998년 특허청은 898명의 대규모 인원과 2959t의 방대한 이삿짐을 가지고 장장 24일 동안 이사를 왔다. 평균 5.7일 소요됐던 다른 청과는 규모부터 남달랐다.
이정구 심판관은 대전에 오고 싶어 특허청에 지원했다며 대전에 대한 애정을 과시했다.
“특허청은 이공계 출신들이 많고 업무 특성상 KAIST와 대덕특구가 인접해 있는 대전으로 오는 것은 최상의 시나리오였다. 과학도시와 특허청의 만남으로 업무적인 성과도 꽤 컸다”며 청사 이전을 성공적이라고 자평했다.
이정구 심판관은 “특허는 미래의 먹거리를 찾을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하고 선도할 수 있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대전시가 특허허브를 지향하고 있고, 과학기술도시로 R&D 분야를 확산시키기 위해서라도 특허정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청사가 대전으로 내려오면서 단순히 심사와 출원에 국한되지 않고 국가 연구개발에 상당한 역할을 해야 함은 앞으로 나아갈 특허청의 비전이기도 하다.
서울살이에 지쳐 있었기에 산도 바다도 가까운 대전에서의 생활은 선물 같았다. 쉼과 일의 균형을 무너뜨리지 않고 19년을 한결같이 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대전 덕분이라고 이정구 심판관은 고백했다.
이해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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