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창문은 어디든 닫혀있다. 사무실 온풍기는 하루 종일 틀어져있고, 그 아래에서 바깥의 차가움을 잊고 시간을 보낸다. 문득 당연한 답답함을 느끼고 밖을 나섰다. 잠깐이었는데도 금세 춥다는 말을 연발하며 더운 공기를 찾아 돌아온다. 도시 속 일상의 겨울은 매섭게 춥거나 푸석하게 건조하다. 뼈 마디가 자꾸 움츠러든다.
일부러 만나러 찾아가는 겨울은 다르다. 영하의 날씨에 스키를 타고 빙어를 낚으며 맨몸 수영을 할 수 있는 건, 겨울만이 가진 매력을 온전히 느끼러 선택한 일이기 때문이다. 추위는 짜릿한 즐거움이자 신선한 낭만으로 다가온다.
완전한 봄이 되기 전, 아직 겨울이 촘촘하게 들어서 있는 숲을 만나고 싶었다. 새하얀 나무껍질이 눈과 조화를 이루는 인제 자작나무숲은 너무 멀게 느껴졌다. 대신 대전에서 한시간 반 정도 떨어진 완주에 곧게 뻗은 편백나무 사이를 누빌 수 있는 숲이 있다기에 그곳으로 향했다. 과연, 나무들 사이 쌓인 눈이 겨울을 끌어안고 햇살을 맞고 있었다.
편백나무 숲은 완주군 상관면 공기마을 뒷산에 있다. 공기마을라는 이름은 마을 뒷산의 옥녀봉과 한오봉에서 내려다본 모습이 밥그릇 공기같아서 지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단순하게 공기가 깨끗해서 그렇다고도 전해진다.
숲은 1976년에 주민들이 마을 뒤 산자락 85만 9500㎡에 10만 그루의 편백나무를 심고 가꿔 만들어졌다. 올라가는 길의 안내문도 이곳이 사유지임을 강조하고 있다.
관광안내센터를 지나니 하얗게 쌓인 눈 위로 검은 표지판이 나왔다. 길은 크게 두 갈래로, 족욕을 할 수 있는 유황편백탕을 지나 통문으로 가는 방향과 편백숲 오솔길을 옆에 둔 길로 나뉜다. 원래 온천으로 개발하려 했던 유황편백탕은 뜨거운 물이 아니라 차가운 개울물을 끌어오는 족욕탕이다. 유황이 섞였다는 그 물이 궁금했지만, 발을 담구는 건 여름을 기약하며 눈으로 뒤덮인 오솔길을 향했다.
오솔길을 따라 편백나무와 나무 사이에 들어섰다. 여름에는 사람들이 도시락을 먹으며 누워있었을 평상이 눈 이불을 덮고 잠들어 있었다. 계단이 되었다가 의자가 되었다가 했을 큼지막한 바위들이 많이 보였다. 사진기를 든 사람 두 명만 있는 오솔길 안쪽은 고요했다. 길 밖에선 매섭던 바람이 나무사이를 지나느라 차분해졌다.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쳤다. 햇살이 나무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선다. 편백나무가 내뿜는 피톤치드 때문인지 기분 좋은 생각들이 그 빛을 따라 들어섰다. 편백나무는 물에 담가두지 않아도 6개월 정도 푸른 색을 유지하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트리의 재료로 많이 활용한다. 히노키탕이라고 불리는 일본식 욕조에 쓰이는 것도 편백나무다. 집먼지 진드기의 번식을 막는 효과가 있어 아토피 치료에도 좋다고 한다.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아이들이 빨갛고 파란 썰매를 타고 내려온다. 경사가 급하지는 않지만 진녹색 방어벽으로 둘러싸인 썰매장보다 나무사이를 달리는 모습이 훨씬 더 즐거워보였다. 아이들이 내려온 방향을 따라 올라가는 동안 썰매자국이 스키장처럼 주욱 이어져 있었다. 그 중간중간 개 발자국이 보이더니 눈앞에 하얀 개 한 마리가 나타났다. 개는 주민이 창고로 쓰는 텐트 옆을 맴돌다 다가왔다. 먹을 것을 주고 싶었지만 가진 건 물 밖에 없었다. 다행히 손길만 닿아도 빙그르르 돌며 제 몸을 사람 다리에 부볐다. 올라가는 길을 조금 따라오더니 어느새 텐트 근처로 돌아가는 걸 보니 주인이 있는 개인 것 같았다.
산책로 초반은 많은 이들이 다녀 눈길이 단단해 걸을만했지만, 중반부터는 아이젠을 끼워야 할 만큼 눈이 쌓여있었다. 운동화 절반이 눈에 묻혔다. 숲 전체를 돌아보면 영화 '최종병기 활'을 촬영한 오두막과 숲도 나오지만, 가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했다.
아쉬움에 고개를 들어 나뭇가지 끝을 바라봤다. 편백나무가 하늘을 감싸 길을 만들고, 그 아래 양지바른 곳엔 눈이 녹아 물기가 돌았다. 눈이 내렸던 하늘길을 따라 봄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가는길=전주에서 상관 죽림리행이나 관촌행 버스를 타고 죽림리에서 내려 걸으면 도착한다. 승용차로는 공기마을을 내비게이션에 입력하고 전주에서 남원방면 17번 국도를 따라 달리면 된다. 주차장이 두 곳 있는데 아래에 있는 곳은 입장료를 받는다고 써있으니 관광안내센터 앞 주차장까지 올라오는 편이 좋다.
글·사진=박새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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