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첨밀밀' |
1996년 작 <첨밀밀>은 기억을 다룬 영화다. 이제 고전적 장치가 되어버린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의 흑백 처리는 이 영화가 주인공들의 회상과 추억을 그려내고 있다는 걸 알게 한다.
과거 스무 살 남짓 풋풋했던 시절은 그립기도 하고, 바보 같기도 하고, 희망적이기도 하고, 절망적이기도 하다. 꿈꾸던 미래와 이상은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고, 인생은 의지와 상관없이 엉뚱하게 흘러가 버렸다. 대륙에서 꿈꾸던 홍콩은 중국 반환을 앞두고 더 이상 기회의 땅이 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꿈을 향해 미국으로, 캐나다로 떠났다. 꿈꾸던 미래와 어긋나 버린 현실은 주인공들에게 고통과 아픔을 안겨 준다. 실패한 결혼은 여소군과 이교 모두의 현실이다. 그러나 깨어진 장밋빛 이상과 현실의 세파 속에서도 우정은 빛이 나고 서로의 아픔과 인생사를 위로하는 마음은 사랑이 된다.
홍콩에서의 젊은 시절과 미국으로의 이민, 그리고 이별과 재회는 등려군의 노래와 함께 한다. 어쩌면 이 영화는 음악 영화와도 같다. 빛나던 한 시절, 달콤했던 사랑의 속삭임 그리고 이별의 아픔까지 노래는 이야기보다 진실하다는 옛사람의 말은 영화 속에서 적실하다. 등려군의 사망 소식과 더불어 끝을 맺는 영화는 기묘하게도 두 주인공의 재회의 모티프로 그 소식을 활용한다. 의미 있는 이의 죽음은 한 사람의 생애에서 마디가 된다. 이제 이들은 청년기를 끝내고 중년의 초입에 서게 된 것이다.
젊은 날에 대한 추억은 즐겁고도 고통스러운 것이다. 영화는 두 주인공의 스토리와 더불어 반환기의 홍콩에 대한 기억, 그리고 윌리엄 홀든에 대한 연정으로 한 평생을 지낸 고모의 삶을 중첩해서 보여 준다.
회상을 통해 재현되는 옛 시간은 평균적이지 않다. 선택적으로 재현되는 것은 물론이고, 때론 느리게 또 때론 급한 흐름을 보인다. 기억 속의 시간은 해석되고 의미화 되기 때문에 각기 다른 톤과 정서를 지닌다. 그렇기에 <첨밀밀>의 시간들 역시 어둡기도 하고, 밝기도 하며 무겁기도 하고 경쾌하기도 하다.
▲ 영화 '첨밀밀' |
여소군과 이교가 처음으로 마음을 나누게 되는 자전거 장면은 노래와 함께 가볍고, 어느 해 연말 등려군의 음반을 팔다가 찬비 속에 실망했던 장면은 무겁고 우울하다. 만둣국을 먹고 나누는 정사의 시간은 헤어나올 수 없는 매혹과 위태로운 분위기를 동시에 자아낸다. 카메라와 조명, 편집 또한 이러한 분위기를 위해 장면마다 상이한 방식을 취한다.
영화처럼 현실에서도 시간이 흐른다. 행복 속에서도, 고통 속에서도 흐르고 흘러서 현재의 시간은 추억이 된다. 기억 속에서 시간은 선택되고, 해석된다. 정작 그 순간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것들이 후에 기억 속에서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으로 되살아나기도 하고, 반면 중요했던 일들이 기억의 선택과 해석을 거친 뒤 아무 의미도 지니지 않게 되기도 한다.
설 명절도 지나고 내일 모레면 대보름이다. 곧 봄이 올 것이다. 청춘의 날 실패의 쓰라림을 한 그릇의 만둣국으로 달래던 여소군과 이교처럼 설에도 고향에 가지 못하고 고시원이나 학원가에서, 혹은 도서관에서 미래를 준비했을 젊은이들을 생각해 본다. 그들도 새봄에는 부디 희망과 기쁨의 노래를 부르게 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비록 지금 그들이 통과하고 있는 청춘의 시간이 행복과 환희로 빛나지 못할지라도 훗날 돌아보아 의미 있는 기억으로 새겨지게 되기를 바란다.
김대중 영화평론가, 영화학박사
▲ 김대중 영화평론가,영화학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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