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지연 우송대 외래교수 |
작은 규모의 지역 도서관에 가보면 혼자 온 노인들이 낡은 컴퓨터를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쉽게 마주칠 수 있다. 내멋대로의 편견이겠으나, 그들은 외롭고 심심해 보인다. 중구문화원도 국가가 편의와 복지를 제공하는, 조그마한 공공기관인 만큼-그런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다만 여긴 나름 젊은 층이었다. 가장 왕성하게 일할 나이임에도 평일 낮에 일이 없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외롭고 심심하기보다, 왠지 부끄럽고 배고파 보였다.
사십대 초반 즘 될 법한 마른 체격의 여성이 의례적으로 한 바퀴 둘러보고는 내가 앉아있는 데스크 쪽으로 곧장 다가와 기웃거렸다. 스스로 음료를 타 마실 몸짓을 해 보이며 커피 한 잔 마셔도 되냐 묻길래 그러시라고 했다. 마침 정수기 위에 올려둔 대추차가 눈에 보였나 보다. 그녀가 커피 말고 대추차를 먹어도 되겠냐고 다시 물었다. 율무차나 대추차 봉지는 다른 것들에 비해 두툼하다. 그럴싸한 건더기들도 들어 있다. 몇 개 안 가지고 와서 아끼고 있었는데, 그걸 먹겠다고 들이대니 내심 당황스러웠다. 허나 대추차 따위가 무슨 대수라고, 사람 민망하게시리 먹지 못하게 막기도 어려웠다. 또 그러시라고 했다. 그녀는 따뜻한 대추차 한 잔, 두 손으로 감싸쥐고 감사하다며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갔다.
이상한 것이 나의 목울대에 걸렸다. 그러니까 뭐랄까, 그건 인스턴트 대추차 안의 잣 같은 것이었다. 아니, 인스턴트 율무차의 콩가루 같은 것이었다. 자칫 잘못 삼키면 기침이 나오고 사레까지 들리는, 위험하고 껄끄러운 게 목젖에 매달려 있었다. 영양보충할 만한 것을 발견하자마자 재빨리 기회를 잡아 열심히 먹어두려는 그녀의 동물적 성실함과, 그 사이로 내비치는 인간적 염치가 동시에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내가 빛바랜 등산복 주머니에 대추차 열 봉지를 넣어주고, 미담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 씩 웃어본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쉰 언저리로 보이는 한 남성은 가운데의 라운드 테이블에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았다. 키는 작아도 건강하고 다부져 보였다. 그는 고구마를 주로 공략했다. 쌀과자에 귤까지, 테이블에 내어놓았던 음식이란 음식은 깡그리 먹어치우며 거의 끼니를 때우다시피 하는 와중에 - 그는 자꾸만 그림에 대한 감상과 미학 토론을 시도했다. “그림들이 참 좋네요!”, “화가 분이 누구신가요?”, “색감이 뛰어납니다.” 상대의 사정과 목적이 빤히 느껴지는데, 굳이 장단 맞춰주기도 어색하여, 다소 냉랭한 어조로 최소한의 답변만을 했다. 그의 눈은 벽에 걸린 그림들을 보고 있었지만, 그의 손은 또 하나의 과일 정물화처럼 바구니에 쌓여 있던 고구마와 귤을 향해 바쁘게 움직였다. 지치지도 않고 원맨쇼로 꿋꿋이 미술 교양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그가 마침내 그림 잘 보고 간다고 호기롭게 인사하고 나가려는 데에 대고 나는 이렇게 물을 뻔했다. 잘 드셨나요? 역시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는 하루종일 이런 곳을 찾아 돌아다니는 걸까.
어쩌면 흔할 테지만, 평소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 꼭 전형적으로 가난한 행색을 한 것도 아닌 사람들. 비교적 멀쩡하다는 이유로 불우이웃을 돕는 봉사활동의 형식적 테두리 안에서는 영영 만날 수 없는 사람들.
가난은 여전히 극단적이거나 천편일률적인 이미지로 소비되곤 한다. 높은 GDP를 기록하는 오늘의 한국, 풍족한 시대를 살아가는 가난한 도시인의 초상을 그려본다. 그늘진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길고양이처럼, 대형마트의 시식코너마냥 내놓아진 잉여된 먹거리를 슬쩍 얻어먹고 가는 자들의-부끄러워 소심해진 얼굴과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과장하는 얼굴을.
송지연 우송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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