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눈은 강원도 지역에 주로 집중됐던 것으로 보입니다. 중종실록 58권, 중종 22년 3월 9일 기록에는 “강원도 평강(철원 위 북한지역) 회양 회양(淮陽) 금성(錦城 현재 나주)지역에 눈이 한 자나 되게 내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한 자’는 현재 단위로 30cm로 성인 남성 무릎 아래 까지 내렸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종실록 16권, 현종 10년 3월 15일 기록에는 “제천현(堤川縣 현재 제천시)에, 본월 1일에 눈이 내렸는데, 정강이가 묻힐 만큼 쌓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정강이가 묻힐 정도의 적설량이면 앞서 언급했던 한 자(30cm)정도로 추정됩니다.
선조실록 162권, 선조 36년 5월 30일 기록에는 제주 지역에 내린 눈이 봄이 되도록 녹지 않아 귤맛이 좋지 않음을 아뢴 기록이 있습니다. 제조 목사 김명윤이 올린 장계에는 “지난 임인년 11월에 큰눈이 내렸는에, 평지에도 깊이가 2자(60cm)가 넘어 겨울이 지나도록 녹지 않았고 정월이 되어도 겨울처럼 추워 꽁꽁 얼어붙었으니 근고에 없던 일입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효종실록 13권, 효종 5년 12월 22일 기록에는 “함경도에 큰 눈이 와서 백성 중에는 깔려 죽은이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현종 13년 1월 19일에는 큰눈이 내렸는데 한 자 남짓 쌓였다. 서울의 산과 각릉(各陵)의 소나무가 눌려 부러진 것이 매우 많았다"는 기록이 확인됩니다.
폭설은 민간생활에 대한 불편 뿐 아니라 군사작전에도 큰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현재도 폭설은 군사작전에 주요한 변수가 되고 있습니다. 광해군 10년 12월 6일 기록에는 “교 유격(喬遊擊)의 가정(家丁) 송조립(宋朝立)과 우 유격(于遊擊)의 가정 등이 적로(賊路)를 정탐하기 위하여 만포(滿浦)에까지 이르렀다가 폭설에 막혀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라는 기록이 있고 인조 2년 2월 20일에는 “호위하는 군사가 눈을 무릅쓰고 진흙길을 가느라 온몸이 젖었으니 매우 가엾다. 즉시 파진(罷陣)하여 그들로 하여금 민가에 나아가 옷을 말릴 수 있게 하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처럼 폭설은 과거나 현재에도 주민들에게 크고 작은 피해를 입히고 있습니다. 이번주 주말에도 눈이 한차례 더 예상되고 있습니다. 큰 피해 없도록 철저한 대비가 필요해 보입니다.
편집2국 금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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